<암이 예술을 만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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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은 교수 그림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환자나 보호자가 선택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작습니다. 내가 원치 않아도 정해진 시간에 검사해야 하고, 약을 먹고 정해진 침대에 정해진 옷을 입고 누워야 합니다. 초반에는 답답하거나 불편하지만 언젠가부터는 그저 그 안에서 점점 ‘따라가는 사람’이 돼 갑니다.

이런 상황 속 미술치료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조금 더 환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집니다. 종이의 질감이나 크기, 사용 재료, 색의 선택이 시작되기 때문이죠. 뭔가 알록달록한 미술 재료를 앞에 두고 하는 작은 선택은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순간만큼이나 고심하게 됩니다.

환자분들이 어려운 투병 과정에서 미술치료라는 시간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첫 번째 요소가 바로 이러한 자발적 선택 과정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색상과 질감의 재료를 보는 것만으로도 통증으로 가득 차 있던 환자의 몸과 마음에 작은 환기가 되어주는 듯합니다.

“맘에 안 드네” “망쳤네, 이거 버려 버렸네. 새 종이 주세요.”라며 환자분들은 쉽게 자신의 그림이 망쳤다고들 말씀하십니다. 실제 삶의 만족도가 떨어지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작업이 맘에 들 리 없습니다. 무엇을 그려도 또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잘했다”, “멋지다”고 평가해도 지금 내 마음이 편치 않고 나의 상황이 수용되지 않으면 어떤 작업을 해도 환자 스스로 만족스러운 결과물로 느끼는 것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때 미술치료사인 저는 “이걸로 한 번 더 해보실까요?”라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미 “망쳤다”고 결정한 환자분들은 화를 내기도 하십니다. 때로는 자신이 망쳤다고 말하던 그 그림을 찢기도 하시는데 저는 종이를 찢으시는 그 감정이 지나가길 기다립니다.

환자분들은 자신이 이렇게 종이를 찢으며 감정을 표출했다는 것을 인식하실 때 부끄러워하시기도 하고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라며 당황스러워하십니다. 저는 종이를 찢은 그 행동이 정말 솔직한 감정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며 그 감정과 행동을 수용하실 때까지 환자의 옆에 함께합니다.

이제 새로운 종이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며 환자분들은 이전에 찢어진 종이를 버리라고 하지만 저는 그 종이들을 지퍼백에 넣어 잘 보관합니다.

다른 미술치료 시간에 저는 때때로 환자분들이 힘들어서 배경에 색을 칠하지 못하겠다고 하시거나 원하는 이미지가 있는데 도저히 그려볼 엄두가 안 난다고 하시면 그때 이전에 지퍼백에 보관했던 찢어진 종이를 꺼내어봅니다.

하얀 도화지에 그 찢어진 종이들을 새롭게 배치하고 풀로 붙여서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는 방법을 알려드립니다.


며칠 전 “망쳤다”며 찢어버렸던 조각들로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에 신기해하는 표정 ‘쓰레기’라고 생각했던 종이가 새로운 미술 재료로 마주하는 순간 환자분들은 다양한 표정을 지으십니다. 그리고 그 위에 실로 꿰매기도 하고 테이프로 붙이기도 하고 불을 이용하여 겹겹이 붙여 나가면서 도화지 한 장일 때보다 더 두껍고 단단한 이미지를 만들어 볼 수 있습니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남들과 다른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슬픔이라고 말할 때 슬픔 너머에 감사도 바라볼 수 있고 누군가 분노라고 보는 것을 분노 너머의 수용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술을 가까이 두고 활동하다 보면 환자분들이 짜증이나 분노의 감정이라고 느낄 수 있었던 찢어진 조각들을 새로운 재료로 경험하는 귀한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암을 진단받은 많은 환자분은 열심히 살아왔던 인생이 멈춰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그동안의 계획을 미루고 익숙했던 자기 모습과도 잠시 거리를 두고 환자로만 살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멈춤보다 다른 길의 시작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찢어진 종이가 또 다른 그림의 시작이 되듯, 우리의 시간도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잠시 다른 모습으로 머무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위에 다시 무언가를 이어 붙일 수 있는 날이 찾아옵니다.

조각난 마음을 연결하고 깨진 듯한 마음이 꿰매어지는 것처럼 하루하루 작은 조각의 퍼즐을 하나씩 맞춰 나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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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은 드림(서울여자대학교 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