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 개 중 39종만 적용… 절반 이상은 점자 미표기
EU는 이미 전면 의무화인데, 식약처 “대상 확대 계획 없어”
“배려 아닌 권리”… 시각장애인 복약 안전 공백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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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 한 약국에서 판매 중인 점자 도입 안전 상비약./사진=뉴시스
시각장애인 A씨(40)는 최근 아찔한 경험을 했다. 안약을 넣으려다 집어 든 것이 무좀약이었던 것. 다행히 손에 닿은 튜브의 질감이 달라 멈췄지만, 그는 “몇 초만 늦었어도 눈에 무좀약을 짰을 것”이라며 “지금도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고 말했다. B씨(30) 역시 아버지의 혈압약을 자신의 약인 줄 알고 복용했다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국내 등록 시각장애인은 약 25만 명에 이른다. 이들에게 의약품은 치료 수단이 아니라, 때로는 사고 위험 요인이 된다. 정부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지난 2024년 7월부터 의약품 점자 표기 의무화 제도를 시행했다. 그러나 시행 후 2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현장에서는 점자 제품과 비점자 제품이 혼재돼 있고, 정보 접근성 역시 제한적인 ‘과도기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제도 시행에도… 현장은 여전히 ‘혼재’
정부는 약사법 개정을 통해 일부 의약품의 포장과 용기에 점자와 음성·수어 영상 변환용 코드를 의무적으로 표기하도록 했다. 1년의 계도기간을 거쳐 현재 제도는 본격 시행 중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의약품정책과 관계자는 “의무 대상 품목은 2025년 7월 이후 제조·수입 제품에 점자 적용이 완료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다만 기존에 점자 없이 출고된 의약품이 당분간 시중에 유통될 수는 있다. 의약품 유통기한이 통상 36개월에 달하는 점을 고려하면, 당분간 혼재 상태는 불가피하다는 의미다.

실제 약국과 편의점에서는 점자 표기가 있는 제품과 없는 제품이 함께 진열돼 있다. 실로암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지난해 7월부터 10월까지 조사해 발표한 ‘2025년 의약품 점자 및 접근성 코드 표시 실태 모니터링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의무 대상 39종 중 실제 점자가 적용된 제품은 17종(43.6%)에 그쳤다. 미이행 사유로는 재고 소진 대기, 설비 투자 지연, 수입품 유예 등이 꼽혔다.

◇3만 개 중 39개… ‘극히 제한적인’ 권리
문제는 제도 적용 범위 자체가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식약처에 따르면 국내 유통 완제의약품은 3만여 개에 이른다. 이 가운데 점자 표기 의무 대상은 안전상비의약품 11종, 일반의약품 25종, 전문의약품 3종 등 총 39종에 불과하다. 전체의 극히 일부만 제도 적용을 받는 셈이다. 이 때문에 시각장애인들이 일상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의약품은 여전히 정보 접근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형식적인 점자 표기도 한계로 지적된다. 점자에 ‘제품명’만 담겨 있어 복약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어렵고, QR코드 기반 음성 안내 역시 고령층에게는 활용 장벽이 높다. 시각장애인 C씨(60)는 “약국에서 설명을 들어도 집에 오면 잊어버리기 일쑤”라며 “QR코드는 스마트폰으로 정확히 스캔하기 어렵고, 인식이 안 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결국 시각장애인들은 가족이 올 때까지 복용을 미루거나, 약통에 고무줄을 감아 구분하는 등 불완전한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C씨는 “가족에게 계속 묻기 미안해 점점 안 묻게 된다”며 “이제는 약통 서랍을 여는 것 자체가 두려워진다”고 했다.


◇“비용 부담” 호소하는 업계… “안전 공백” 외치는 장애인단체
제약업계는 점자 표기 확대의 현실적 부담을 강조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포장 설비를 변경하면 비용이 최소 10% 이상 증가한다”며 “제품마다 재질이 달라 점자 구현 자체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특히 소형 의약품은 점자를 새길 공간이 부족해 디자인을 전면 수정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약국 현장의 시선은 어떨까. 편한약국 엄준철 약사는 “일반의약품의 경우 시각장애인 소비자의 체감도는 매우 낮다”며 “대부분 보호자가 대신 구매하고 복약지도를 전달하는 구조”라고 말했다. 중앙약국 이준 약사는 “현재는 약 상자에만 점자가 있고 내부에는 없어 실제 활용이 어렵다”며 “별도의 점자 복약지도서 등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장애인단체는 정부의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태도를 ‘회피의 언어’라고 비판한다. 실로암장애인자립생활센터 남정한 정책국장은 “기존 재고 소진 시점이 2027년 전후로 예상된다”며 “이는 최대 2~3년의 공백이 존재한다는 의미고, 그 시간은 시각장애인 안전의 공백 시간”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시각장애인들의 요구는 단순하다”며 “‘약 하나 혼자 먹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것뿐인데, 이는 배려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라고 했다.

장애인단체는 ▲과도기 보완책 마련 ▲용기 단위 점자 의무화 ▲점자 품질 표준화 ▲의무 대상 확대 ▲성과 지표 개선 등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식약처는 현재 의무 대상 품목 확대에 대해 별도 계획은 없다는 입장이다.

◇‘전 품목 의무화’ EU 사례 참고를… 민간 협력이 대안
유럽연합(EU)은 이미 2005년부터 전 품목 점자 표기를 의무화했다. 초기 기업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부가 기술 표준을 확립하고 중소기업 대상 지원책을 병행하며 제도를 안착시킨 결과다. 반면 국내는 재정 지원보다는 업계 자율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에 가까운 상황이다.

다만 대한약사회가 민간 차원의 대응에 나섰다. 점자 프린팅 기업과 협력해 약국에서 즉시 복약 정보 라벨을 출력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 시범 사업을 진행 중이다. 전문가들은 이제 필요한 것은 제도의 ‘도입’이 아니라 ‘정착’이라고 입을 모은다. 점자 표기가 단순한 표시를 넘어 실제 복약 안전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대상 확대, 정보 범위 개선, 현장 적용성 확보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장가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