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이 예술을 만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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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은 교수 그림
병원 복도에서 슬리퍼를 끌며 휴대폰을 보고, 편의점을 오가는 청년이 있습니다. 친구들이 보낸 메시지에는 웃는 이모티콘이 가득했지만, 그는 끝내 답장을 보내지 못하고 화면을 꺼버립니다. 이 청년은 대학교 2학년에 올라가며 군 입대를 준비하던 스무 살입니다. 지금은 유방암으로 치료를 받는 어머니를 돌보고 있습니다.

가족의 형태가 간소화되고 젊은 암 환자가 늘어나면서,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디뎌야 할 청년들이 간병의 주역이 되는 ‘영케어러(Young Carer)’가 우리 곁에 부쩍 많아졌습니다. 취업 준비를 하다가, 혹은 꿈을 키워가다가 갑작스러운 가족의 투병으로 자신의 시간은 멈춰버린 채 병원 복도에서 청춘을 보내는 이들이 많습니다.

주변에서 말합니다.
“가족이 너 하나인데 어쩌겠니?”
“지금은 어쩔 수 없잖아.”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청년의 시간이 지금 어디에 멈춰 있는지, 그 청년이 무엇을 내려놓고 있는지에도 우리는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수면시간이 길어진 어머니 침대 옆에서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만 바라보던 그 청년은, 금발 머리에 해골 모양 귀걸이를 한 멋쟁이였습니다. 왜 휴대폰만 보고 있느냐고 묻자, 다른 보호자들과 눈이 마주칠까 봐 시선을 피하고 있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외향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했지만,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사람을 대하는 일이 어렵다고도 했습니다.

낯선 환경 속에서 ‘보호자’라는 새로운 역할까지 더해졌으니, 어색하고 불편한 것이 당연하다고 공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금세 웃어 보입니다. 유명한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객 응대를 잘해 사장님의 인정을 받았고, 그 돈으로 어머니 치료비에 보탬이 되었다고 자신감 있게 이야기합니다. 조금 전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청년과는 전혀 다른, 또래다운 장난스러운 눈웃음을 가진 스무 살의 모습이었습니다.

잠에서 깬 엄마가 미간을 찡그리자, 청년은 웃음을 거두고 어머니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말합니다.

“괜찮아 엄마, 나 여기 있어. 우리 엄마 더 자자.”

아기를 달래듯 어머니를 보듬는 그 모습에 시선이 머물자, 그는 짧게 말했습니다.
“제가 해야죠.”

단단한 말이지만, 안타깝게 들리기도 합니다. 잠시 식사를 하러 나간다고 하더니, 병원 지하 편의점에서 라면과 삼각김밥을 급히 먹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는 조심스럽게 “머리 뿌리 염색을 하고 싶다”며 “때에 안 맞고 철없는 말인 것 저도 알아요”라고 서둘러 앞서 내뱉은 말을 취소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엄마도 너 머리 예쁘게 하고 오면 좋겠다. 엄마는 멋쟁이 아들이 좋아”라고 환자분이 말씀하였고 이내 아들은 편히 웃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보호자가, 특히 부모나 가족을 돌보는 젊은 자녀들은 ‘내가 즐거워도 될까?’라는 죄책감에 스스로를 가두곤 합니다.


하지만 보호자 여러분, 괜찮습니다.

잠깐 웃어도, 친구를 만나도,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하루를 보내도 괜찮습니다. 힘들다고 말해도 되고,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됩니다. 모든 걸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긴 여정을 끝까지 완주하기 위해 살아가기 위한 방식입니다.

환자는 당신의 표정을 먹고 삽니다. 간병은 단순히 약을 챙기는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잠깐이라도 진심으로 웃을 때, 그 밝은 에너지는 환자에게 “나 때문에 네 인생이 멈춘 게 아니구나”라는 가장 큰 안도감을 선물합니다.

가끔은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정리하고, 가장 좋아하는 옷을 입고 병실로 향해 보세요. 당신의 단정한 모습은 병동이라는 그 특별한 공간에 평범한 일상을 불러오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딸, 아들 너무 예쁘네.” 그 한마디는, 그 순간만큼은 우리를 환자와 보호자가 아닌 평범한 가족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혹시 누군가가 “네가 좀 더 해야지”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한 번쯤은 그냥 흘려보내도 괜찮습니다. 당신의 삶은 간병인이라는 이름 뒤에서도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까요.

보호자 여러분, 환자 곁에서 조금 더 당당하게 예뻐지세요. 당신의 웃음소리와 단정한 모습이 환자에게는 그 어떤 치료제보다 강력한 희망의 신호가 됩니다.

괜찮습니다. 잠깐 웃어도, 친구를 만나도,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하루를 보내도.

괜찮습니다. 힘들다고 말해도 되고,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고, 모든 걸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의 삶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까요. 돌보는 사람도, 돌봄 속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입니다. 그 삶 역시, 멈추지 않아도 됩니다.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와 보호자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환자 모두가 오늘만큼은 서로 마주 보는 시선에 봄꽃이 피어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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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은 드림(서울여자대학교 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