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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감에 걸리거나 백신을 맞고, 혹은 특정 환경 물질에 노출되는 경험이 우리 몸의 면역세포에 장기적인 흔적으로 남아 이후 면역력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사진=클립아트코리아
독감에 걸리거나 백신을 맞고, 혹은 특정 환경 물질에 노출되는 경험이 우리 몸의 면역세포에 장기적인 흔적으로 남아 이후 면역력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같은 바이러스에 감염돼도 어떤 사람은 가볍게 앓고 지나가지만 어떤 사람은 중증으로 악화되기도 한다. 코로나19 유행을 거치며 이런 차이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꼽는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전’과 살아오면서 겪은 감염, 백신, 환경 노출 같은 ‘삶의 경험’이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동일한 DNA를 가지고 있음에도, 면역세포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설명하는 개념이 바로 ‘후성유전학적 변화’다. DNA 자체가 바뀌는 건 아니지만, 유전자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조절하는 일종의 ‘스위치’가 달라지는 현상이다. 이 스위치의 상태에 따라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도 세포의 행동은 달라질 수 있다.

미국 솔크 생물학 연구소의 에커 박사 연구팀은 이러한 차이가 실제 면역세포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양한 배경을 가진 110명의 혈액을 분석했다. 대상자들은 독감. 사스(SARS-CoV-2), HIV 감염이나 탄저균 백신 접종, 농약 등 다양한 바이러스, 세균, 환경 물질에 노출된 경험을 가졌다.

연구팀은 DNA의 특정 위치에 붙는 작은 화학적 표시인 ‘DNA 메틸화’를 분석해 유전적 차이와 삶의 경험이 면역세포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를 비교했다. 특히 면역 기억을 담당하는 세포와 빠르게 반응하는 세포 등 역할이 다른 면역세포에서 두 요소가 어떻게 다른 영향을 미치는지도 함께 살폈다.

그 결과, 면역세포의 작동 방식은 유전뿐 아니라 삶의 경험에도 함께 영향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전적 영향은 비교적 안정적인 유전자 영역에서 나타나 장기적인 면역 반응의 기본 틀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감염이나 환경 노출 같은 경험은 외부 자극에 빠르게 반응하도록 조절하는 영역에 더 많이 영향을 미쳤다. 즉, 유전이 면역 시스템의 기본 성향을 만든다면, 삶의 경험은 실제 상황에서의 반응 방식을 세밀하게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우리 몸의 면역 시스템은 단순히 타고난 유전자로만 결정되지 않는다”며 “감염, 백신, 환경 노출과 같은 다양한 경험이 면역세포의 작동 방식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면역력은 타고난 요소와 살아가며 축적된 경험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라는 의미다.

또 이러한 차이가 사람마다 면역 반응이 다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고 봤다. 면역세포에 남은 이런 ‘과거 경험의 흔적’을 분석하면, 특정 감염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미리 추정하는 연구로 이어질 가능성도 제시됐다.

이번 연구는 사람마다 면역세포에 남아 있는 흔적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병원체에 감염되더라도 증상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향후 후성유전학적 특징이 질병의 원인을 분류하거나 위험도를 평가하는 데 활용될 가능성도 제시됐다.

장기적으로는 감염되기 전부터 개인의 유전 정보와 면역세포에 남아 있는 특징을 함께 분석해, 같은 병에 걸리더라도 어떤 사람은 가볍게 앓고 지나가고 어떤 사람은 더 크게 아플지 미리 예측하는 의료 연구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한편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네이처 유전학(Nature Genetics)’에 지난 1월 게재됐다.


이아라 기자 | 오지예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