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담임교사는 다른 장면을 보았다.
유달리 학생은 문제 행동 직전, 늘 교실을 한 번 훑어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면 고개를 돌렸고, 여러 눈이 자신을 향할수록 더 불안해했다. 그 아이는 산만한 학생이기 전에, 불안한 아이였다. 담임교사는 유달리 학생에게 절차에 따른 개입이 더 반복될 경우, 오히려 주변과의 실낱같은 관계마저 붕괴되어버릴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학생의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 설득하고, 통제하는 방식의 기존 개입을 멈췄다. 대신 학생과의 유대를 이어가며 아이를 ‘고쳐야 할 대상’으로만 대하지 않으려 했다.
그 결과, 학생의 폭력적인 행동이, 직접적으로 신체를 맞대지 않는 ‘시늉’을 하는 것으로만 전환됐다. 이따금 파괴적인 행동을 한 후라도 자신이 스스로 정리하는 등 책임지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감정이 격화되다가도 과거처럼 폭발하지 않고, 폭발 이전에 그 장소와 순간을 벗어나는 모습도 관찰됐다.
이 아이는 ‘위기 학생’으로 분류하고 통제하기만 할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담임교사는 학생에게 먼저 말을 걸었음에도 한편으로는 망설였을 것이다. ‘말을 거는 게 아니라, 위기 학생 관리를 위한 기록을 남기는 게 내 역할이 아닐까.’
지금 학교 현장에서 교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절차다. 교육부와 각 시·도 교육청의 위기학생 대응 및 자살 예방 대책은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다. 고위험군 선별, 정서·행동 검사, 전문기관 연계, 보고 체계 강화. 문서만 보면 빈틈이 없다.
그러나 유달리의 교실은 묻는다. 이 정책은 학생의 삶을 읽기 위해 설계된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분류하고 책임을 분산하기 위해 설계된 것인가.
현재 체계의 중심에는 하나의 전제가 놓여 있다. 학교는 위험을 감지해 기록하고 외부의 전문가에게 넘기는 통로라는 전제다. 이 전제가 강화될수록 교실의 역할은 달라진다. 학생의 어려움은 ‘관계 속 해석’이 아니라 ‘위험 분류’의 대상이 되고, 담임교사는 삶을 읽는 존재라기보다 위기를 보고하는 존재로, 상담교사는 의미를 풀어내는 전문가라기보다 연계의 중개자로 자리 잡는다.
정책은 교사에게 사실상 이렇게 말한다. “먼저 기록하라” “먼저 보고하라” “전문기관에 맡겨라” 문제가 생겼을 때 절차를 따랐다는 기록은 행정적으로는 안전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안전이 곧 아이의 안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교사의 판단은 위축되고, 학생과의 대화는 미뤄진다. 유달리와 같은 아이는 충분히 이해받기 전에 ‘위험군’이 된다.
전문기관의 개입은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순서다. 교실에서 충분히 대화로 풀 수 있는 갈등과 발달의 혼란까지 곧바로 의학적 위험의 언어로 번역하는 구조는 보호의 이름으로 관계를 약화시킬 수 있다. 관리가 강화될수록 아이는 더 빨리 교실 밖으로 이동한다. 위기를 관리하는 동안 고립이 심화되는 역설이 생긴다.
유달리에게 먼저 필요했던 것은 약이 아니었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어른이었다. “너는 문제가 아니라 이해받아야 할 존재”라는 경험이었다. 변화는 그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학생들의 자살은 매뉴얼로 예방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말하지 못한 고립의 축적을 가장 먼저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매일 아이를 만나는 교사다. 그런데 지금의 정책은 교사가 아이 곁에 머무는 시간을 넓히기보다, 보고와 연계를 우선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문제는 절차가 아니라 전제다. 학생의 문제는 학교 밖에서만 해결된다는 전제, 이 전제가 유지되는 한, 우리는 보호를 말하면서도 아이를 더 빨리 교실 밖으로 밀어낼 수 있다. 교사는 조심스러워지고, 아이는 더 외로워질 수 있다.
학생을 살리고자 한다면, 매뉴얼을 더하는 대신 교사의 자리를 다시 세워야 한다. 학교를 위험 관리의 통로가 아니라, 학생의 삶을 해석하는 1차 공간으로 회복해야 한다. 유달리의 교실은 이미 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질문에 응답하지 않는 한, 같은 위기는 반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