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재의 음식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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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클립아트코리아
흰밀빵은 오랫동안 고급 음식 대접받아 왔다. 밀의 겨와 눈을 들어내고 몸통이자 양분 저장고인 배젖만 남겨 갈아낸 게 바로 흰밀가루다. 흰밀가루는 발효가 워낙 잘 돼 크고 폭신하게 부풀어 오른다. 덕분에 부드럽고 맛도 좋을 뿐만 아니라 섬유질이 없다 보니 소화도 아주 잘 된다. 1870년대 이후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개발된 현대 제분 설비 덕분에 흰밀가루빵이 대중화됐다.

현대 제분 시설이 등장하기 전까지 흰밀빵은 귀족과 부유층의 음식이었고, 통빵은 서민과 빈곤층의 주식이었다. 그러나 지난 20~30년 사이 이 구도는 완전히 뒤집혔다. 당 섭취가 체중 증가와 각종 대사 질환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혈당만 빠르게 올리는 단순 탄수화물인 흰밀빵은 건강의 적으로 낙인찍혔다. 그 틈을 타 통밀빵은 ‘몸에 좋은 빵’으로 재평가받으며 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통밀빵은 섬유질이 풍부해 천천히 소화되고 혈당도 비교적 완만하게 오른다. 흰밀빵에 비해 구수한 풍미가 강하고 맛의 결도 한층 다채롭다. 이렇게만 보면 통밀빵을 먹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무엇보다 통밀빵은 흰밀빵에 비해 제빵 과정이 훨씬 까다롭고 번거롭다. 흰밀가루는 발효를 방해하는 요소가 물리적·화학적으로 거의 제거돼 짧은 시간 안에 쉽게 부풀어 오른다. 한마디로 실패 가능성이 극히 낮다. 반면 통밀가루는 다르다. 겨와 눈이 물리적으로, 효소가 화학적으로 방해해 반죽의 발효가 잘 되지 않는다. 설사 성공하더라도 흰밀빵에 비해 훨씬 덜 부풀어 조직이 치밀하고 단단하다. 이처럼 통밀가루가 지닌 선천적인 어려움에 대응하고자 제빵에서는 자연발효종을 많이 쓴다. 제품화된 보통의 효모에 비해 높은 산도로 통밀가루의 화학적 방어체계에 맞대응하는 셈이다.


자연발효종의 기본 원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밀가루와 물을 섞어 묽은 반죽을 만든 뒤 상온에 두면 공기와 곡물 표면에 존재하던 효모가 자연스럽게 증식한다. 흔히 ‘천연발효종’이라 부르지만, 다소 과장된 표현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곤충처럼 채집해 쓰는 것이지, 원래 없는 걸 엄청난 노력으로 창조하는 수준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발효종이라고 편한 공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효모를 채집하는 것까지는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이후 먹어 살려야 과제가 만만치 않다. 하루에 한 번은 밀가루로 양분을 공급해야 하는데 빵을 매일 굽는 업장에서는 괜찮지만 가정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더군다나 밀가루를 먹이면 부피가 늘어나므로 자연발효종을 쓰지 않을 경우 일정량을 버려야 하는 번거로움도 상당하다.

자연발효종 빵은 맛의 표정이 훨씬 풍부하지만 젖산 발효로 포도나 살구 수준의 신맛이 나기도 해 모두의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다. 일각에서는 보통의 효모를 쓴 빵에 비해 자연발효종 빵이 소화도 잘 되고 훨씬 건강하다고 주장한다. SNS의 제빵사 등을 통해 활발하게 퍼져나가고 있는 이야기지만 미국의학도서관 논문에 의하면 근거가 없다. 흰밀빵에 비해 통밀빵이 섬유질이 많아 더 건강하다는 정도까지만 인정하고, 너무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게 그야말로 자연스러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