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 예술가와 가족이 함께 만든 말(馬) 작품 128점 전시
치료·소통 위해 시작한 그림이 작가의 길로
“예술하는 데 있어 장애는 장벽 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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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붉게 힘차게 말' 전시에 참여한 손종빈 작가와 그의 어머니, 권라빈 작가와 어머니, 양예준 작가와 어머니.​/사진=러쉬 촬영
붉은 말의 해를 상징하는 가지각색의 말(馬)들이 전시장을 가득 채웠다. 러쉬 두물머리점 러쉬빌리지에 전시된 128점의 작품은 발달장애 예술가와 가족들의 손에서 나왔다. ‘붉게 힘차게 말’이라는 같은 주제 아래, 그림은 작가마다 전혀 다른 시선과 표현을 보여준다. 말로 감정을 또렷이 설명하는 데 조금은 서툴러도, 그림 앞에서 이들은 자신만의 언어를 자유롭게 펼친다. 작품 하나하나에는 각자의 삶과 이야기가 겹겹이 쌓여 있다. 이들에게 그림은 단순한 표현 수단을 넘어, 세상과 자신을 연결하는 가장 정확한 언어다. 전시를 주최한 네이버 커뮤니티 ‘그림엄마’를 운영하는 한젬마 예술감독의 작업실에서 발달장애 예술가 세 명과 그들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림에 담긴 그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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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출품작에 대해 설명하는 양예준 작가와 그의 작품./사진=러쉬 촬영, 양예준 작가 제공
중학생인 양예준 작가(15·서울 양천구)가 그림을 시작한 계기는 ‘미술치료’였다. 만 6세 무렵, 혼잣말과 손을 흔드는 반복 행동이 심해지며 약물치료를 시도했지만 부작용이 커 중단했다. 양 작가의 어머니는 대신 집에 있던 색연필을 손에 쥐여줬다. 그는 “무언가를 막기보다 대체할 방법을 찾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그림은 하루 서너 시간씩 이어졌고, 의미 없는 반복처럼 보였던 선들은 점차 화면을 채웠다. 학원이나 멘토 없이 집에서 그린 그림을 공모전에 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1년에 많게는 120곳에 출품했고,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약 70회의 수상 경력이 쌓였다. 현재는 해외 전시 등 국제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양 작가의 작품에는 ‘눈(目)’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어머니는 “눈 맞춤이 힘든 아이였기에 늘 ‘엄마 눈을 보고 말해야지’라고 했던 게 그림 속에서 눈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작에도 여러 눈동자와 함께 ‘말 모자를 쓴 인물’을 그린 양 작가는 “엄마와 제가 기도하는 모습”이라고 했다.


색연필뿐 아니라 지우개, 칫솔, 수세미까지 활용해 지우고 문지르는 독특한 기법도 특징이다. 어머니는 “틀린 그림이라는 개념을 두지 않았다”며 “그날의 상태가 그대로 남는 과정이 예준이의 스타일이 됐다”고 말했다. 양예준 작가는 앞으로 훌륭한 화가가 되고 싶다며, 특히 아직 그리지 못한 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눈동자를 화폭에 담고 싶다는 바람도 전했다. 어머니는 “아이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그림으로 기쁨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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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출품작에 대해 설명하는 권라빈 작가와 그의 작품./사진=러쉬 촬영, 한젬마 예술감독 제공
권라빈 작가(20·중국 칭다오)는 중국 칭다오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으로, 현지 국제학교를 졸업했다. 어릴 적부터 손에서 색연필을 놓지 않았고, 어디를 가든 A4용지를 들고 그림을 그렸다. 초등학교 1학년 무렵, 우연히 본인의 그림을 본 현지 미술 관계자가 “색 사용이 남다르다”고 말한 것이 첫 계기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미술 인프라도 없었고, 작가를 꿈꿀 여건도 아니었다. 학교 행사 때마다 그림을 내고 무대에 서며 작은 성공을 쌓아갔고, 2025년 졸업을 앞두고 직접 제작한 굿즈를 판매해 수익 약 80만 원을 자폐인 센터에 기부했다. 같은 해 밀알복지재단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으며 ‘그림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걸 처음 실감했다.

라빈 작가의 그림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핑크색, 크리스탈, 판타지 동물, 그리고 숨겨진 ‘하트’. 동물의 눈동자나 발굽, 화면 어딘가에는 반드시 하트가 들어간다. 어머니는 “아이의 그림에는 늘 사랑이 넘친다”며 “본인은 슬픔보다 행복을 먼저 말하는 아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사자·코끼리·말의 몸을 결합한 ‘판타지 동물’ 시리즈를 구상 중이다. 시즌제로 번호를 붙여 최대 7개 시즌까지 이어가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최근 건국대 미대 현대미술 전공에도 합격해 입학을 앞두고 있다. 권 작가는 “무지개 가득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는 게 꿈이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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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출품작에 대해 설명하는 손종빈 작가와 그의 작품./사진=러쉬 촬영, 한젬마 예술감독 제공
손종빈 작가(21·광주광역시)는 조선이공대 시각애니메이션콘텐츠과에 재학 중이다. 디지털 드로잉과 회화, 글자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다. 여섯 살까지 말을 거의 하지 못했던 그는 진단 이후 다양한 치료를 병행했고, 그중 가장 빠른 반응을 보인 영역이 미술이었다. 그림을 통해서야 의사 표현이 가능했고, 그것이 세상과 소통하는 출발점이 됐다. 손 작가는 “어릴 적부터 만화와 애니메이션, 레고 조립을 좋아해 자연스럽게 미술로 진로를 정했다”고 말했다.

그의 작업에는 극도의 꼼꼼함이 배어 있다. 어머니는 “완벽주의에 가까운 성향이라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다”며 “꾸준함이 아이 작업의 가장 큰 힘”이라고 말했다. 덕분에 작품의 밀도는 높아졌지만, 회화 작업은 체력 부담이 컸다. 최근에는 작업 강도를 조절하며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어가고 있다. 집중이 흐트러질 때면 멈추기보다 캐릭터 스케치를 하거나 몸을 움직이며 리듬을 되찾는다.

이번 전시에는 회화 1점과 디지털 드로잉 1점, 총 두 점을 출품했다. 어머니는 “조형·조소·디지털 작업을 함께할 때 아이의 세계가 더 잘 드러난다”고 말했다. 손 작가는 “현실의 경험에 상상을 더해, 현실보다 조금 더 따뜻한 풍경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앞으로는 일상의 평범한 순간을 흥미롭게 풀어내는 작업을 통해, 캐릭터 등 대중과 소통하는 미술로 영역을 넓혀가고 싶다는 계획이다.


◇“아이 속도 맞춰 가능성 열어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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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쉬 두물머리점 ‘러쉬 빌리지’에서 진행 중인 전시 ‘붉게 힘차게 말’에 걸린 작품들.​/사진=한젬마 예술감독 제공
그림은 이들의 삶의 방향도 바꿨다.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제도 이전에 사회의 시선과 편견이다. 이들 역시 많은 눈물을 흘렸고, 처음부터 ‘작가’를 목표로 그림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치료와 소통, 일상의 안정을 위해 시작한 그림이 어느 순간 공모전과 전시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는 늘 가족의 지지와 기다림이 있었다.

양예준 작가의 어머니는 “아주 작은 소망에서 시작된 그림이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장애를 받아들이기부터 쉽지 않았지만, 아이가 작업에 몰입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가족의 삶 역시 달라졌다고 했다. 그는 “예준이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했지만, 지금은 예준이 덕분에 살게 됐다”며 “예술 안에서는 장애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권라빈 작가의 어머니는 “장애가 있다고 늘 슬프거나 좌절하는 건 아니다”라며 “아이와 손을 잡고 함께 가다 보면 상상하지 못한 곳에 와 있다”고 했다. 손종빈 작가의 어머니 역시 “아이에게 맞는 속도를 찾는 게 가장 중요했다”며 “그림은 아이에게 자신감과 꿈을 되찾아준 계기”라고 전했다. 이들은 성과보다 아이의 속도에 맞춰 가능성을 열어두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기획자의 시선: 한젬마 예술감독
‘붉게 힘차게 말’ 전시는 발달장애 예술가를 보호의 대상이 아닌, 세상에 기여하는 주체로 세우는 데서 출발했다. 전시를 주최한 ‘그림엄마’는 국내외 발달장애 자녀를 둔 어머니들이 모여, 미술에 재능을 지닌 아이들의 성장을 함께 지원해왔다. 한젬마 예술감독은 “이번 전시는 재능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발달장애 예술가들이 자신의 감각으로 세상과 연결되는 자리”라며 “예술 앞에서 장애는 장벽이 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 감독은 이번 프로젝트를 “전시라는 형식을 빌린 성장 구조”라고 설명한다. 매년 띠 동물을 주제로 작가를 모집하고, 실력보다 참여 의지를 우선한다. 신입 작가에게는 밀착 멘토링을 제공하되, 표현 방식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는 “발달장애 예술은 가르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발견하는 일”이라며 “작품을 마주할 때마다 예상을 뛰어넘는 경이로운 감각의 세계를 만난다”고 했다. 어머니들 역시 캡션 작성부터 포장까지 전시 전 과정에 참여하며 ‘아티스트 매니저’로 성장한다. 한 감독은 “전시는 하나의 장치일 뿐, 진짜 목적은 아이와 부모가 사회와 연결되는 경험을 쌓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발달장애인은 약 270만 명에 이르지만, 예술적 재능이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다. 한 감독은 “문제 행동으로 불리는 반복과 몰입 안에 재능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서번트 증후군), 우리가 아직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라며 “한 아이의 가능성을 믿고 함께 길을 찾으려는 시선이 모일 때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풍성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전시 공간을 협업한 러쉬코리아는 2023년부터 발달장애 예술가들과의 전시·판매형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예술에 편견은 없다’는 철학 아래 이번 특별전 역시 누구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도록 마련됐다. ‘붉게 힘차게 말’ 전시는 경기도 양평 러쉬 두물머리점 러쉬빌리지에서 2월 15일까지 매주 주말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