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권익위는 보건복지부와 심평원, 질병관리청을 대상으로 초응급 희귀질환 환자의 신속한 치료를 위한 제도 개선을 권고했다/사진=연합뉴스
'초응급 희귀질환' 환자들에게 시간은 생명 유지에 직결된다. 발병 직후 치료 시점에 따라 생존 여부와 예후가 달라지는 만큼, 치료 지연은 곧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치료제가 개발됐음에도 복잡하고 긴 행정 절차와 제도적 장벽으로 적절한 시기에 치료받지 못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국민권익위원회는 17일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질병관리청을 대상으로 초응급 희귀질환 환자의 신속한 치료를 위한 제도 개선을 권고했다.

권익위는 보도자료를 통해 현대의학은 과거 치료가 불가능했던 희귀질환 영역에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혁신적인 치료제를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지만, 환자들은 여전히 경직되고 위험 회피적인 규제를 넘지 못해 치료 기회를 상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희귀 신장질환인 ‘비정형 용혈성 요독증후군(aHUS)’ 사례는 현행 사전승인심사제도의 모순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aHUS는 발병 후 48~72시간 이내에 치료하지 않으면 영구적인 신장 손상이나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초응급 희귀질환이다.

이번 권고는 치료 적기를 놓고 절망을 겪은 환자와 가족들의 민원,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된 결과다. 실제 환자 A씨는 “주사를 맞은 당일, 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며 치료 시점이 생명 유지에 결정적이라고 증언했다. 환자단체 사무총장 B씨 역시 “치료제가 있음에도 제도적 장벽 때문에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은 환자에게 이중적인 고통”이라며 “환자의 알 권리와 선택권, 치료 접근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난 2018년 국민신문고에도 “aHUS 환자는 빠른 치료가 필요한 환자임에도 투여 기준과 승인 절차의 모순으로 치료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며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민원이 제기된 바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고가 약제에 대해 사전승인심사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의료 행위나 약제 투여 전 환자의 적격 여부를 판단해 급여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희귀질환 치료제의 경우 심평원 사전심사분과위원회에서 개별 사례별 심사를 거쳐 급여 여부를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여러 임상·검사 기준을 모두 충족해야 하며, 현행 제도상 2주 이상 소요되는 심사 기간은 초응급 환자에게 치명적인 골든타임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이에 권익위는 보건복지부의 ‘요양급여의 적용기준 및 방법(약제)’ 고시 개정을 통해 골든타임이 요구되는 초응급 희귀질환을 대상으로 한 신속 심사 경로(Fast-Track)를 신설하고, 심평원 관련 규정 개정을 통해 신속 심사 운영체계를 구축할 것을 권고했다.

또 환자의 절박한 상황보다 재정 건전성이 우선되는 현 심평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심사 구조와 위원회 구성이 내과·약학 중심으로 편중돼 전문성 공백이 발생하는 문제도 짚었다. 권익위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운영규정’을 개정해,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한 ‘희귀질환 약제 심사위원회’를 신설할 것을 권고했다.

행정 절차 간소화 필요성도 제기됐다. 현재 요양기관은 사전심사를 위해 각종 행정 서류와 검사 결과를 준비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며, 이는 의료진과 환자 모두에게 부담으로 작용해 치료 개시 지연을 초래하고 있다. 권익위는 사전승인 관련 행정 서류를 간소화하고 병원 시스템과 연계하는 방식으로 절차를 개선할 것을 권고했다.

아울러 희귀질환 진단과 치료가 상급종합병원에 집중돼 지방 거점 병원에서는 치료조차 어려운 현실로 인해 지역 간 의료 격차가 심화되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권익위는 질병관리청에 지역 희귀질환자의 의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전문기관 네트워크 강화와 전문기관 지정 확대를 추진하고, 장기적으로는 권역별 희귀질환 전문기관의 기능을 분화해 상급병원은 진단을, 지역 거점 병원은 치료·재활을 담당하는 체계를 구축하는 정책을 제안했다.

권익위 관계자는 “환자 지원을 위한 법의 취지와 괴리된 규제, 생명권을 위협하는 행정 지연, 독립성과 전문성이 부족한 심사 체계, 과도한 행정 부담 등 다층적인 문제를 분석했다”며 “환자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하는 실질적인 제도 개선을 추진한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