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이 예술을 만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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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은 교수 그림
암 진단 이후 적극적인 치료와 수술을 받는 환자분들은 종종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인생 이야기, 한번 들어보실래요? 이런 드라마가 없습니다.”

아프기 전과 완전히 달라져 버린 일상, 병을 겪고 난 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 환자분들은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일을 겪고, 하루에도 여러 번 마음의 파도가 밀려온다고 조용히 털어놓습니다. 감정이 요동치다 보면, 곁을 지키는 가족에게 상처가 될까 두려워 말문을 닫게 된다고도 하십니다.

그럴 때 저는 짧게라도 ‘마음의 항해 일지’를 통해 하루를 기록해 보라고 권합니다. 치료로 힘든 날엔 단 한 줄만 써도 좋고,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 날엔 그림 한 장만 그려도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암 진단을 받은 지인에게 병원에서도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일기장이나 스케치북을 선물하곤 합니다. 그 일지는 마음이 흔들릴 때 잠시 머물러 숨 고를 수 있는 조용한 항구가 되어 줍니다.

나침반이 돼주는 기록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조용히 자신의 일지를 열어, 마음이 가는 대로 끄적여 보세요. 화를 그림으로 표현해도 좋고, 속상한 마음을 단 몇 줄의 글로 남겨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날짜를 적어 하루를 기록으로 묶어 둡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기록하는 일지 작업은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일 수 있지만, 말로 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들을 '안전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암 환자분들은 불안, 두려움, 화, 억울함 등 복합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데, 글이나 그림은 감정을 전환시켜 줄 수 있는 우회로가 되어줍니다.

이렇게 기록을 시작하면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림이나 글로 표현된 투병 과정의 감정이 시각적으로 남아서, 나중에 "내가 왜 이렇게 힘들었지?"가 아니라 "이때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며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과정은 감정의 홍수 속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게 돕습니다.


희망의 조각을 발견하는 시간
더불어 이러한 하루의 기록은 희망과 감사의 작은 단서를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루의 전부를 담기보다 그날의 한 장면, 한 감정, 한 생각을 일지에 담다 보면 작지만 중요한 경험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 창밖으로 들어온 빛, 내게 도움을 준 순간들 같은 조각들이 일지를 통해 되살아나며 "내가 오늘도 살아냈구나" 하는 감각이 생깁니다.

항상 치료 과정에 어려움을 겪던 한 20대 환자분은 일지를 쓰기 시작하면서 자신에게 주사를 놓으러 오는 간호사 선생님에게서 나는 포근한 향기에도 감사함을 느꼈고, 식사를 챙겨주시는 영양사 선생님의 목소리에서 생기를 느꼈다고 고백하신 적이 있습니다.

자기 존재감을 회복하는 힘
또한, 이렇게 글이나 그림으로 기록하는 일지 작업은 환자분의 ‘자기 존재감(Self-Agency)’을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암 치료 과정은 환자분께 ‘내 삶을 내가 통제하지 못 한다’라는 느낌으로 무력감을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마음의 항해 일지는 하루 중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행동이며, 환자에게 작지만 강력한 ‘내가 나를 돌보고 있다’는 감각을 준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마음의 항해 일지'라고 해서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감정과 하루를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기록입니다. 이 작업은 환자가 자기 안의 목소리를 듣고 마음의 중심을 찾으며, 하루를 의미 있게 정리하는 과정이 되어줍니다.

이것은 암 환자에게 하루를 살아낸 마음의 흔적을 남기고, 감정을 안전하게 표현하며, 자신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선물하는 따뜻한 기록 방식입니다.

암 진단 이후 많은 분이 망망대해에 놓인 기분이라고들 하십니다. 그럴 때 조용히 나침반을 들고 방향을 체크하고 날씨를 점검하며, 치료라는 항해를 용기 있게 나아가 보시기를 응원합니다. 회복을 향한 나침반의 방향을 우리 모두가 함께 바라보고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도 있고 맑은 날도 있겠지만, 우리의 항해는 멈추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항해 일지에 용기와 희망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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