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은 학교 밖 청소년을 이렇게 규정한다. 만 9세부터 24세까지의 청소년 가운데 초·중학교에서 3개월 이상 장기 결석하거나, 취학 의무가 유예·면제된 청소년, 고등학교 제적·퇴학·자퇴를 한 청소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청소년을 말한다. 쉽게 말해, 나이는 청소년이지만 학교를 다니지 않는 모든 청소년이다.
그러나 법적 정의가 이들의 삶을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우리 사회는 이 단어에 불편한 그림자를 더한다. “문제가 있으니까 그만뒀겠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성급한 판단이 작동한다. 그러나 실제 아이들을 만나보면 전혀 다른 얼굴이 드러난다. 그들은 학교를 떠난 청소년이지, 삶을 일탈한 청소년이 아니다. 여성가족부의 ‘2023년 학교 밖 청소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학교 밖 청소년이 학교를 떠난 가장 큰 이유는 ‘심리·정신적 어려움’(31.4%)이었다. 이어 ‘원하는 것을 배우고 싶어서’(27.1%)가 뒤를 이었다. 흔히 ‘문제 행동 때문’이라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정서적 부담과 새로운 진로 탐색이 주요한 이유였다. 이 사실은 우리 사회의 선입견을 되묻게 한다.
입시 중심의 교육 시스템은 이미 많은 아이의 다양한 속도와 정서적 필요를 담아내기 어렵다.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청소년의 자살 이유 1위는 학업 스트레스다. 한국교육개발원의 2022년 설문 결과 고등학생 72%가 “학교가 나의 스트레스 주요 원인”이라고 답했다. 청소년기의 뇌는 아직 성숙 과정에 있고, 감정 조절을 담당하는 전두엽 발달은 20대 초반까지 이어진다. 이 시기에 지속되는 과도한 경쟁과 기대의 부담은 뇌의 스트레스 회로를 과활성화하고, 불안·우울을 심화시킨다.
최근 통계는 이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지난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초·중·고 학생은 221명, 학생 10만 명당 자살자 수는 4.3명으로 역대 최고치다. 이 수치는 지금의 교육환경이 청소년에게 얼마나 벅찰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학교는 더 이상 모든 청소년에게 안전한 공간이 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학교 밖이 곧 자유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여성가족부의 ‘2023년 학교 밖 청소년 실태조사’에서도 이러한 현실이 확인된다. 학교 밖 청소년들은 선입견·편견·무시(26.2%), 새로운 친구 만들기 어려움(25.0%), 의욕 저하(24.2%), 진로 탐색의 어려움(23.2%)을 가장 큰 애로로 꼽았다. 실제 생활에서도 낮에 버스를 타거나 거리를 걸어갈 때 “왜 학교 안 가니?”라는 시선이 따라붙는다. 학교에서는 ‘문제아’, 거리에서는 ‘수상한 아이’가 되기 쉽다. 이런 시선과 고립이 반복되면 관계가 끊어지고 정체성은 쉽게 흔들린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에서 만나는 학교 밖 청소년의 공통된 말은 하나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이 말은 단지 외로움이 아니라, 소속감의 붕괴와 자기 존재감의 흔들림을 의미한다. 국립정신건강센터의 ‘2023년 청소년 정신건강실태조사’에 따르면, 학교 밖 청소년의 정신장애 유병률은 일반 청소년의 4배 이상이다. 또한,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10대 청소년 정신건강 실태조사(2021)’에 따르면, 학교 밖 청소년 10명 중 3명은 우울·불안·자살 충동 등을 겪는 ‘정신건강 위험군’으로 확인됐다. 이 통계들은 학교 밖 청소년에 대한 지원이 ‘학교 복귀’를 목표로 한 정책을 넘어, ‘정신건강 보호 체계’가 중심이 되어야 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국가와 지자체도 ‘학교밖청소년지원센터(일명 꿈드림센터)’를 중심으로 지원을 확대해 왔다. 그러나 교육부와 여성가족부 자료에 근거하면, 2019년 기준 학생 1인당 공교육비는 약 1,195만 원인 반면 학교 밖 청소년은 64만 원 수준에 머문다. 약 20배에 달하는 이 격차는 학교 안·밖 청소년에게 제공되는 ‘기회와 존엄’이 얼마나 다르게 설계되어 있는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아직도 학교 밖 청소년을 ‘복귀의 대상’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은가. 학교로 돌아오면 회복, 돌아오지 않으면 실패라는 단순한 도식으로 보지는 않는가. 그래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왜 학교를 뛰쳐나왔니?”가 아니라, “지금은 어떤 길을 찾고 있니?”로. 학교 밖 청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비판이 아니라 연결의 손길이다. 편견의 벽이 낮아질 때, 청소년의 마음 문도 열린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어떤 선택을 했든, 그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하는 사회적 태도다. 다음 질문도 이어진다.“학교가 청소년을 품어야 하나, 청소년이 학교를 견뎌야 하나?” 그러나 더 중요한 지점은 따로 있다. 학교 밖과 안을 나누기보다, 청소년을 먼저 품는 태도, 그리고 사회 전체가 ‘품는 공동체’로 작동하는 구조다.
학교가 아니어도 배움은 일어난다. 카페의 작은 테이블, 작업장의 분주한 움직임, 봉사 현장의 따뜻한 손길도 모두 배움의 장이다. 지역 곳곳에서 마주치는 어른들의 짧은 격려 한마디는 학교 밖 청소년에게 중요한 ‘회복 자원’이 된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회복하는 존재다. 관계가 끊기면 뇌는 위협으로 감지하고, 자존감은 쉽게 흔들린다. 반대로 한 사람의 진심 어린 관심은 청소년의 뇌를 안정시키고 마음을 회복시킨다. 그래서 제도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관심’이다. 낙인이 아닌 이해, 판단이 아닌 존중이다. 청소년을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것은 제도만도, 관계만도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변해야 할 것은 청소년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다. 학교 밖에서든 안에서든 아이들이 안전하게 머물며 다시 힘을 찾을 수 있도록, 사회 전체가 이들의 ‘회복 기반’이 되어야 한다.
(*이 칼럼은 사공정규 동국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기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