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직후부터 피해 학생 전문적 치료·지원 필요
실질적 처벌 강화하고, 온라인 규제도 마련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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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뀐 학교 폭력 양상에 대응하려면 제도와 교육, 치료 전반에 걸친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최근 10년간 학교 폭력의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서울경찰청이 2015년부터 2024년까지 청소년 범죄 통계를 분석한 결과, 폭행·상해 같은 전통적 유형은 줄어든 반면 정서적·성적(性的) 폭력은 급증했다. 지난해 폭행과 상해는 1284건으로 10년 전보다 19% 감소했고, 금품 갈취도 같은 기간 7.6% 줄었다. 그러나 모욕·명예훼손 등 정서적 폭력은 65건에서 348건으로 435% 늘었고, 성폭력 범죄도 192건에서 709건으로 269% 증가했다. 최근에는 스토킹까지 더해지며 폭력 양상이 다양해지고 있다.

현장 조사도 같은 흐름을 보여준다. 학교 폭력 피해 지원 단체 푸른나무재단에 따르면 신체 폭력은 2016년 20.7%에서 2024년 11.9%로 줄었지만, 같은 기간 사이버폭력은 5.1%에서 17.0%로 늘었다. 특히 2023년 실태조사에서는 피해 학생의 98%가 사이버폭력을 경험했다고 답해, 학교 폭력이 온라인과 긴밀히 연결돼 있음을 보여준다.

◇SNS 확산·입시 경쟁, 학교 폭력 양상 변화시켜
학교 폭력이 신체적 폭행이나 금품 갈취에서 사이버불링(온라인 괴롭힘)이나 성적 모욕 같은 양상으로 변화한 가장 큰 배경은 ‘SNS의 확산’이다. 청소년 대부분이 온라인 공간을 생활의 중심으로 삼으면서 교실에서 일어나던 따돌림이 단체 채팅방이나 SNS로 옮겨가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넘나드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익명성이 공격성을 키우는 데다, 딥페이크 영상 제작이나 이미지 변형처럼 기술적 장벽이 낮아진 점도 폭력의 파급력을 크게 넓혔다”며 “청소년들이 성인 사회의 행태를 모방하면서, 흔적이 덜 남는 방식을 찾으며 폭력이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소년 가치관과 부모의 교육 태도 변화도 영향을 미쳤다. 곽 교수는 “경쟁 위주의 입시 문화로 또래 관계가 단절되고, 부모가 성적 관리에 치중하면서 정서적 지지를 소홀히 하게 됐다”며 “이로 인해 아이들이 온라인에서 소속감과 우위를 확인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고 했다.

◇도움 요청 어렵고, 정신건강 피해 극심
문제는 이러한 유형의 폭력이 겉으로 드러나기 어려워 대응이 늦고, 그만큼 후유증이 심각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유재현 교수는 “신체적 폭력과 달리 정서적·성적 폭력은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아 주변인들의 도움을 받기 어렵고, 피해자가 수치심 때문에 문제를 숨기는 경우가 많다”며 “그 결과 우울·불안·수면장애 같은 정신적 어려움뿐 아니라 두통·복통 같은 신체 증상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관련 연구가 이를 뒷받침한다.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연구팀이 런던 지역 중·고등학생 2218명을 3년간 추적한 결과, 사이버불링 피해자의 28.6%가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와 유사한 증상을 보였다. 또 미국 아이오와대학교·호주·이탈리아 공동 연구팀이 20년간 진행한 장기 연구에서는 정서적 학대가 신체적 학대보다 성인기의 우울증·불안 발병과 더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결과가 확인됐다.

성인기의 대인관계 형성에도 부정적 영향을 남긴다. 곽금주 교수는 “정서적 폭력 피해 학생은 자존감이 낮아지고 대인관계를 회피하는 경향이 생긴다”며 “특히 성적 폭력 피해자는 수치심과 낙인감이 커 회복이 어렵고, 성인기의 친밀한 관계 형성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심리적 후유증이 크기 때문에, 피해 학생은 사건 직후부터 전문적인 치료와 지원을 받아야 한다. 치료의 첫 단계는 행동과 정서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유재현 교수는 “자해나 자살 위험이 있는 학생은 행동 조절 훈련이 필요하고, 위험 신호가 명확하면 입원치료를 통해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후 약물치료와 상담치료로 우울·불안을 완화하고, 인지행동치료를 통해 정서를 표현·조절하는 방법을 배우도록 돕는다”며 “또래 관계로 서서히 복귀할 수 있도록 노출치료를 병행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노출치료는 두려움이나 불안을 유발하는 상황을 안전한 환경에서 점진적으로 경험하게 해 회피를 줄이는 치료법이다.


학부모의 조기 발견도 중요하다. 푸른나무재단 학교 폭력SOS센터는 ▲정서 변화(우울·무기력) ▲행동 변화(등교 거부, 휴대폰 사용 습관 급변) ▲관계 변화(친구 단절, 가족 대화 회피) ▲신체 변화(두통·복통 등 반복 증상) ▲휴대폰 알림 끄기·특정 앱 회피·지속 확인 행동 등을 위험 신호로 제시한다. 이러한 변화가 2주 이상 지속되거나 일상과 학업에 지장을 주면 즉시 전문 평가와 치료를 받아야 하며, 자해·자살 위험이 보이면 응급 개입을 요청해야 한다.

◇플랫폼 대응 늦어 피해 장기화 우려… 강제력 있는 조치 필요
그러나 피해 학생과 가정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온라인 폭력에 법과 제도가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는 점도 문제다. 최근 판례에서 모욕·명예훼손뿐 아니라 성적 굴욕감이나 정신적 피해까지 폭력으로 인정하는 흐름이 나타나지만, 여전히 제도의 틀은 제한적이다. 푸른나무재단 학교 폭력SOS센터 관계자는 “현재 제도는 피해 발생 이후에야 개입하는 사후적 구조인데다가, 사이버폭력은 플랫폼 사업자의 협조 지연으로 피해가 장기간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명백한 모욕 게시물임에도 삭제·차단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 피해자의 고통이 커진다는 것이다.

한국여성변호사회 문혜정 변호사(법률사무소 정)는 “가해자가 미성년자인 경우 소년재판을 통해 ‘교화 중심’의 처분이 내려지면서 피해자는 실질적인 처벌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다”며 “이 같은 제도적 한계는 피해자가 법과 제도를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어, 보호받지 못한다는 박탈감과 2차 피해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했다.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려면 사건 초기부터 신속하고 강제력 있는 대응이 필요하다. 가해·피해자 즉각 분리와 전문 인력에 의한 조사를 의무화하고, 온라인 가해에 대해서는 삭제·차단 법정 기한과 재유포 방지 의무 등 플랫폼 책임 규정을 명확히 해야 한다. 문혜정 변호사는 “피해자 보호를 처벌보다 앞세우는 원칙이 제도 전반에 반영돼야 한다”며 “플랫폼의 신속한 협조를 담보하는 규정 정비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예방과 교육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학교 폭력 예방을 위해 주입식 캠페인보다는 역할극·프로젝트 등 체험형 수업을 늘리고, 입시 위주 문화를 넘어 동아리·체육·봉사활동 같은 긍정적 경험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 이를 학교·지역·가정이 함께하는 장기 로드맵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곽금주 교수는 “아이들이 안전한 관계를 직접 경험하도록 돕는 체험형 교육이 효과적”이라며 “단기 처방이 아닌 장기 계획으로 학교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치료·지원 체계도 ‘사건 이후’가 아니라 ‘발생 즉시’ 작동해야 한다. 위기 상황에서는 안전 확보(필요시 보호 입원 등)를 최우선으로 하고, 약물·상담 치료, 또래 관계 회복 훈련을 병행해 학교 복귀를 지원해야 한다. 학교(위클래스)–교육청 치료비 지원–지역 정신건강 자원을 원스톱으로 연결해 학기 중·방학 중 끊김 없는 지원이 가능해야 한다. 유재현 교수는 “조기 개입이 예후를 좌우한다”며 “안전을 확보하고 치료적 개입을 서둘러야 학교·가정·지역사회로의 건강한 복귀가 가능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