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발제를 맡은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서종희 교수​가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사진=유예진 기자
최근 5년간 7400여 건의 의료분쟁 조정 절차가 이뤄진 가운데, 의사들이 형사소송에 쉽게 휘말리는 구조가 필수의료 기피를 심화시킨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일본·뉴질랜드 등 해외 제도를 참고해 한국 의료 현장의 사법 리스크를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민사 환자 승소율 높고, 형사 기소는 남발… 필수의료 기피 부추겨
지난 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전진숙 더불어민주당 의원, 서명옥 국민의힘 의원, 이주영 개혁신당 의원과 대한의사협회가 공동 주최한 ‘의료분쟁 관련 법·제도 개선방안 모색 공청회’가 열렸다. 발제를 맡은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서종희 교수는 “한국의 의료사고 소송 구조가 사회적 비용을 키우고 필수의료 위축을 불러온다”고 했다.

서종희 교수가 책임연구자로 참여한 ‘의료사고 관련 민·형사 소송 조사 분석 연구’에 따르면, 국내 법원은 의료사고 민사소송에서 인과관계 입증을 환자에게 유리하게 완화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대표적으로 의사의 설명의무 위반에 대해 위자료를 인정하거나, 치료기회 상실론을 적용해 손해배상을 인정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치료기회 상실론은 의료진의 과실로 환자가 치료 기회를 잃은 경우, 그 자체를 손해로 인정하는 법리다. 2020년 이후 매년 700~900건의 의료과오 민사소송 1심 판결이 내려졌으며, 이 중 절반가량에서 환자 청구가 일부 또는 전부 인용됐다. 서 교수는 “법경제학적 측면에서 지금과 같은 제도의 운용은 사회적 비용 증가로 이어진다”며 “환자 승소율이 절반을 넘는다는 건 과잉·소극 진료와 필수의료 기피를 불러 국민 의료서비스 향상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형사 사건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드러났다. 최근 5년간 의사가 입건된 사건은 700여 건에 달했지만, 최종 유죄 판결은 20건 남짓에 불과했다. 무죄율은 90%를 넘지만, 기소와 수사 절차가 장기간 이어지면서 사실상 처벌에 준하는 위축 효과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다. 서 교수는 “이런 구조가 의료진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필수의료 기피를 심화시키는 요인”이라고 했다.

◇“뉴질랜드처럼 무과실 보상체계, 필수의료부터 도입해야”
서 교수는 해외 사례를 통해 대안을 제시했다. 일본은 2004년 후쿠시마현 오오노병원 산모 사망 사건에서 담당 의사가 수술 1년 뒤 체포되자 무리한 형사 기소에 대한 비판이 확산했다. 이후 2009년 산과의료보상제도와 2015년 의료사고조사제도를 도입해 의료사고 소송 건수를 2004년 1100건에서 2023년 610건으로 줄였고, 승소율도 약 20% 수준에 머물렀다.


뉴질랜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무과실 손해배상 제도인 ACC를 운영한다. 환자는 의사 과실 여부와 관계없이 국가가 운영하는 공사 기금으로 보상을 받으며, 소송 절차 없이 신속히 구제된다. 이로 인해 의료진은 형사·민사상 분쟁 부담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진료 환경을 유지할 수 있다.

서 교수는 “한국도 산부인과·응급의학과 같은 필수의료부터 무과실 보상체계(ACC)를 도입해야 한다”며 “재정은 기금화나 일부 보조로 마련하고, 경과실에 대해서는 형사 책임을 면제하는 방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판례가 과실 책임의 체계를 벗어나 의사의 민사 책임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며 “경과실에 대해서는 형사 책임을 면제하고, 환자 피해를 신속히 구제해야 한다”고 했다.

◇“의료분쟁 제도 개선, 재정·형사·피해 구제 과제 해결해야”
정부쪽 인사로 토론회에 참여한 보건복지부 김수영 의료기관정책과 사무관은 정부의 신중한 입장을 전했다. 김 사무관은 “해외 사례를 참고할 필요는 있지만, 우리나라의 재정 구조와 보험 체계에 맞는 단계적 검토가 필요하다”며 재원 마련과 건강보험 제도와의 조화를 강조했다.

사법 현장의 고민도 제기됐다. 이종길 대구지법 부장판사는 “의료사고 발생 시 환자 측은 형사고소부터 진행하는 경향이 있고, 의료진은 민사보다 형사 문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며 “민사책임과 형사책임은 독립적 관계지만 매년 수백 명의 의사들이 경찰·검찰 조사와 형사재판으로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환자도 의료과실 입증, 손해배상 지연, 장기간 소송으로 고통받는 건 마찬가지”라며 “양측 이해를 조절하기 위해 의료진의 민사 책임은 강화하되 형사소송 남용을 막을 수 있는 제도를 모색해야 한다”고 했다.

환자단체는 피해자 관점에서 제도적 한계를 짚었다. 간사랑동우회 윤구현 대표는 “의료계는 수십 년간 의료사고 처리 특례를 주장했지만 구체적 조건을 제시하지 못했다”며 “형사처벌의 기준, 형사면제의 조건, 민사 소송 대신 조정·합의를 유도할 구체적 대안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실제 환자들이 조정 제도에 접근하기조차 어렵고 피해 회복까지 수년이 걸린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