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경구 피임약 등 호르몬 피임법이 단순히 임신을 막는 역할을 넘어, 여성의 감정 반응과 기억 처리 방식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사진=클립아트코리아
경구 피임약 등 호르몬 피임법이 단순히 임신을 막는 역할을 넘어, 여성의 감정 반응과 기억 처리 방식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호르몬 피임법은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틴을 이용해 생리 주기를 조절하거나, 정자의 이동·수정·착상을 억제하는 방식이다. 대표적으로 경구 피임약, 피임 패치, 질 내 고리, 자궁 내 장치(IUD), 피부 삽입형 임플란트 등이 있다.

미국 라이스대 연구진은 호르몬 피임법이 감정 조절과 기억력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해 여성 179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이 중 87명은 피임약·패치 등 호르몬 피임법을 사용 중이었고, 나머지 92명은 자연 생리 주기를 유지했다. 참가자들은 긍정적·부정적·중립적 이미지를 본 뒤, 거리 두기, 재해석, 몰입 등 다양한 감정 조절 전략을 사용하도록 했다. 이후 연구진은 이 과정이 감정 반응과 기억력에 어떤 차이를 만드는지 측정했다. ‘거리 두기’는 상황을 자신과 분리해서 바라보는 전략으로, 감정 반응을 약화시켜 부정적인 감정을 덜 느끼게 하는 것이다. ‘재해석’은 상황을 긍정적 또는 중립적으로 다시 해석하는 전략으로, 감정의 의미를 바꿔 불쾌함을 줄이는 방법이다. ‘몰입’은 감정에 적극적으로 빠져드는 전략으로,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것이다.

분석 결과, 호르몬 피임법을 사용하는 여성들은 자연 주기 그룹보다 감정 조절 전략 효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에서 그 차이가 컸다. 다만, 이미지와 관련한 사사건의 세부 사항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향을 보였다.  예를 들어, ‘거리 두기’ 전략을 적용했을 때, 호르몬 피임법 사용자들은 부정적 감정을 효과적으로 줄였지만, 동시에 관련 이미지에 대한 기억은 더 흐릿해졌다. 반면 자연 주기 그룹에서는 이런 기억 손실이 나타나지 않았다.

연구진은 이러한 현상이 단순한 기억력 저하가 아니라, 불쾌한 경험을 무디게 해 뇌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매커니즘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연구를 이끈 인지신경과학자 베아트리즈 브란다오 박사는 “피임약은 임신 예방에 그치지 않고, 감정과 기억을 처리하는 뇌 영역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정신 건강 측면에서도 피임약의 역할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공동 저자인 스테파니 리얼 교수도 “피임약이 감정 조절 방식을 바꿀 수 있으며, 이 변화가 기억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흥미롭다”고 했다.

연구진은 특히 호르몬 피임법을 사용할 경우 에스트로겐 수치가 낮아지면서,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와 편도체 등 뇌 부위의 기능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번 연구에는 한계가 있다. 참여자의 대부분이 경구 피임약 사용자였으며, 자궁 내 장치(IUD)나 삽입형 임플란트 등 다른 피임법의 영향은 별도로 비교하지 못했다. 또한 자연 주기 그룹의 생리 단계(배란기·월경기 등)를 구체적으로 추적하지 않아, 호르몬의 자연 변동이 감정·기억에 미치는 영향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연구진은 향후 다양한 피임법을 비교하고, 생리 주기별 뇌 반응 차이까지 포함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연구는 국제 학술지 ‘호르몬과 행동(Hormones and Behavior)’ 저널에 지난달 14일 게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