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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에서 발달장애 아동 치료 분야​에 쓰이는 다양한 형태의 디지털 치료제가 개발되고 있다​./사진=클립아트코리아
AI 기술을 활용한 진단과 치료가 의료계 전반에 확산되는 가운데, 발달장애 아동의 사회성 발달을 위한 ‘디지털 치료제(디지털 의료기기)’가 주목받고 있다. 기존에는 병원이나 치료센터에서 약물치료, 대면 심리치료, 사회기술 훈련 등을 받아야 했던 아이들이 이제는 가정에서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지속적인 개입이 특히 중요한 발달장애인 가족들에게는 반가운 변화지만, 동시에 ‘정말 효과가 있을까', ‘보편적으로 쓰일 수 있을까’라는 우려도 여전하다.

◇게임·로봇 기반 디지털 치료제 속속 등장
발달장애 아동 치료 분야에 쓰이는 디지털 치료제는 앱이나 게임 등 디지털 기반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환자의 인지·언어·사회성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국내외에서 다양한 형태의 디지털 치료제가 개발되고 있으며, 일부는 임상시험을 통해 실제 효과도 입증했다.

국내 기업 마인드허브는 지적발달장애, 경계선지능, 치매, 뇌졸중 환자 등을 대상으로 하는 AI 기반 인지·언어 재활 프로그램인 ‘제니코그(Zenicog)’를 개발했다. 이는 경기도 내 AI 실증사업을 통해 2000명 이상의 사용자를 대상으로 효과를 검증받았다. 마인드허브 관계자는 “앱 기반 훈련은 집에서 손쉽게 할 수 있고, 아이가 무엇을 잘하고 부족한지 훈련 리포트를 제공해 경제적 부담도 줄일 수 있다”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병원 중심 치료에서 가정 중심 재활로의 전환 가능성을 높게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자폐스펙트럼장애와 사회적 의사소통장애 아동·청소년을 위한 디지털 치료기 개발도 활발하다. 디지털 치료기 전문기업 뉴다이브는 디지털 훈련 프로그램 ‘NDTx-01’을 통해 사회성 향상 효과를 입증했다. 뉴다이브 관계자는 “이 프로그램은 게임 형식으로 학교 상황을 제시하고, 사용자가 문제를 해결하며 사회적 상호작용을 훈련하는 방식”이라며 “식약처로부터 혁신의료기기로 지정받았고, 일본 후쿠이의과대학과도 일본어 버전 실증 사업을 추진 중이다”고 말했다. 음성 기반 대화 기능과 인지 자극 콘텐츠를 통해 감정 이해 훈련을 돕는 AI 로봇 ‘모모(MOMO)’를 개발한 와이닷츠 역시 200여 명 이상의 자폐 아동을 대상으로 효과를 검증한 바 있다.

◇병원 연구도 활발… “기존 치료 한계 보완 가능”
의료 현장에서도 디지털 치료제를 적극 연구 중이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정유숙 교수,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유재현 교수, 대구가톨릭대의료원 정신건강의학과 최태영 교수 공동 연구팀은 지난 6월 ‘NDTx-01’을 활용한 임상시험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발표했다. 10~18세 자폐 및 사회적의사소통장애 청소년 38명을 대상으로 6주간 진행한 연구에서, 기존 치료에 게임형 디지털 치료제를 병행한 그룹은 사회성, 일상생활 능력, 반복 행동 등에서 유의미한 개선을 보였다.

정유숙 교수는 “자폐 청소년의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또래와의 소통에서 비롯되는 사회성 문제”라며 “기존에는 PEERS 같은 대면 집단 프로그램이 효과적으로 입증돼 있었지만, 거리·비용·기관 부족 등으로 치료 지속이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디지털 치료제는 이러한 한계를 보완할 수 있어 온라인으로 진행 가능한 사회성 프로그램을 개발하게 됐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서울대병원, 서울아산병원, 분당차병원 등 주요 대학병원들도 디지털 치료제 전문 기업과 협력해 자폐 아동의 문제 행동을 완화하거나 인지 발달을 돕는 디지털 치료제 연구·개발을 수년 전부터 진행 중이다.


◇정부도 개발 나서… 2027년 식약처 허가 목표
정부 차원의 움직임도 본격화되고 있다. 자폐 유병률이 세계적으로 두 번째로 높은 한국에서 효과적인 치료제 개발의 필요성이 제기된 가운데, 정부가 지난 2월 디지털 치료제 개발에 본격 착수한 것으로 확인됐다. 영유아기 자폐 스펙트럼 장애 환자의 빅데이터를 고도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2027년까지 디지털 치료제를 개발해 식약처 허가를 받는 것이 목표다.

해당 의료기기는 자폐 스펙트럼을 포함해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틱장애 등 다양한 발달장애의 조기 진단과 치료에 활용될 예정이며, 정부는 이를 위해 올해부터 최대 4년간 약 93억7000만원의 예산을 투입할 계획이다. 그동안 미지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자폐 치료 분야에서 과학 기반의 해법이 나올 수 있을지 기대가 커지고 있다.

한편, 디지털 치료제를 환자에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식약처의 디지털 의료기기 허가가 필요하며, 임상연구를 통해 검증을 거쳐야 한다. 현재 국내에서 디지털 치료제는 불면, 뇌인지재활, 호흡기 재활 등 일부 분야에서 식약처 허가를 받아 사용되고 있다. 정유숙 교수는 “자폐 치료 분야는 아직 초기 단계지만 앞으로 임상 근거를 확보해 처방 가능한 치료로 자리 잡으면, 시간·공간 제약 없이 반복 사용이 가능해 치료 패러다임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맞춤형 개입 기대되나, 효과 입증된 도구 선택해야”
전문가들은 디지털 치료제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사용에 신중함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정 교수는 “자폐의 핵심 증상인 사회적 상호작용 문제에 대해 현재까지 FDA 승인 표준 약물이 없다”며 “발달장애 환자 수는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디지털 치료제는 맞춤형 개입이 가능하고 비용 부담도 줄여주는 실질적인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제품이 아직 검증된 것은 아니다. 고대구로병원 소아정신건강의학과 지수혁 전 교수는 “디지털 치료제는 뇌를 직접 바꾸는 마법 같은 장치가 아니라, 학습과 반복을 통해 치료 효과를 내는 훈련 도구로 봐야 한다”며 “다양한 디지털 치료제가 개발·출시되고 있는 초기 단계인 만큼, 검증된 제품을 신중히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접근성이 큰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 될 수도 있다. 부모가 정확한 사용법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검증되지 않은 앱을 무심코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 교수는 “전문가의 확인과 지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디지털 치료제는 환자에게 동일한 훈련이 아닌 AI 기반 분석을 통해 개인 맞춤형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발달장애 아동 치료에 효율적인 접근법이 될 수 있다. 뉴다이브 관계자는 “디지털 치료기의 가능성을 현실화하고, 대면 치료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폐 아동·청소년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지속적인 연구개발과 사업화를 이어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