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

‘백신 음모론자’ 美 보건장관, 백신 전문가 전부 해임

정준엽 기자

미국 보건계 "신뢰 훼손" 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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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미국 보건복지부 장관/사진=조선일보DB
백신 음모론자로 유명한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미국 보건복지부 장관이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백신 자문위원을 모두 해고했다. 기존 자문위원들이 백신 제조사와 이해관계에 얽혀 있었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현지 업계 전문가들은 “대규모 해고가 백신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신뢰를 훼손한다”며 일제히 비판하고 나섰다.

◇케네디 "자문위원, 제약사와 이해관계 있어"
미국 보건복지부는 케네디 장관이 질병통제예방센터 산하 예방접종자문위원회(ACIP) 위원 17명을 모두 해임했다고 9일(현지시간) 밝혔다. 복지부는 이들을 모두 해임한 후 새로운 위원을 다시 선임할 계획이다.

예방접종자문위원회는 성인과 소아가 각각 어떤 백신을 접종해야 하는지 논의해 질병통제예방센터에 권고하는 기관이다. 자문위원회가 특정 백신의 접종을 권고하면, 메디케이드 등 미국 연방 정부의 의료복지 제도를 통해 비용 지원이 이뤄진다. 위원회는 케네디 장관이 자문위원을 모두 해임하기 전까지 감염내과·소아과 전문의와 감염병 역학 전문가, 백신 전문가 등으로 구성됐다. 이번에 해임된 위원들은 모두 조 바이든 전 행정부 시절 임명됐으며, 이 중 13명은 지난해 임기를 시작한 인사들이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이 4년 임기의 위원 전원을 조기에 해임했던 사례는 없었다.

이 같은 결정은 케네디 장관과 CDC가 백신 접종 권고 대상을 두고 갈등하면서 이뤄졌다. 앞서 케네디 장관은 지난달 27일 코로나19 백신 접종 권고 대상에서 건강한 어린이와 임산부를 제외했으나, CDC는 같은 달 30일 건강한 어린이도 여전히 접종 대상이라며 케네디 장관의 결정을 반박했다.


케네디 장관은 백신 접종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등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펼쳤던 백신 음모론자로 알려졌다. 이번 인사 교체 과정에서도 동일한 기조를 고수했다. 그는 “예방접종자문위원회의 위원들 중 대부분이 백신을 판매하는 제약사에서 상당한 자금을 지원받는 등 끊임없는 이해충돌 논란에 휘말려 왔다”며 “새로운 위원들은 백신 산업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외신 보도에 따르면, 자문위원들은 규정상 백신 제조사와 관련 있는 기관의 주식을 보유한 경우 자문위원으로 활동할 수 없다.

◇업계 “백신 신뢰 훼손” 반박
전문가들은 이번 복지부의 결정에 대해 비판하고 나섰다. 전 FDA 제시 굿맨 수석과학자는 "이번 일은 비극"이라며 "이들은 과학자들로 구성된 매우 전문적인 집단이며, 이러한 정치적 개입은 오히려 신뢰를 떨어뜨릴 뿐"이라고 말했다. 미국의사회(AMA) 브루스 스콧 회장 또한  "자문위원회는 과학과 데이터에 기반한 논의를 통해 신뢰할 만한 조언을 줄 수 있는 기관"이라며 "이번 케네디 장관의 조치는 백신으로 예방 가능한 질병 발생이 증가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소아과학회 감염병위원회 숀 오리어리 위원장은 "이번 결정으로 인해 미국에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할 것을 우려한다"며 "사실 오히려 케네디 장관이 백신에 대한 불신을 가장 크게 퍼뜨린 장본인인데, 그가 신뢰를 회복하고자 자문위원을 모두 교체한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말했다.

미국 정계 역시 부정적인 반응이다. 상원 민주당 척 슈머 원내대표는 "백신 전문가 위원회 전체를 없애는 것은 신뢰를 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괴하는 것"이라며 "더 심각한 것은 이번 결정이 정치가 공중 보건보다 더 중요하다는 섬뜩한 메시지로 작용한다는 것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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