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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력에 좌우되는 발달장애 치료… “정부·의료계·보험사 힘 모아야” [조금 느린 세계]
신소영 기자
입력 2025/05/07 15:17
실손보험 한계 넘으려면… 공공의료 확대·조기 개입 체계·통합 지원 절실
A양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3세 이전 조기 발견과 개입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많은 아이들은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 비용이 너무 크고, 정보는 부족하며, 병원 예약은 하늘의 별 따기다. 실손보험이 치료를 결정하고, R·F코드 진단명 하나로 경제적 뒷받침이 달라지는 이 구조. 우리는 이미 앞선 기사에서 보여줬다. 아이가 ‘느리다’고 말하는 순간, 부모는 치료와 비용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그 사이 아이는 매일 조금씩 뒤처진다. ‘느린 아이’의 치료비 전쟁은 어떻게 해야 끝날 수 있을까. 정부와 의료계, 보험사 등 전문가에게 물었다.
◇제자리걸음인 정부… “제한된 건강 정책 개선돼야”
우리나라 발달장애 등록 아동은 연간 2만 명, 추정되는 발달지연 아동은 수십만 명이다. 이처럼 치료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공적 의료 지원 체계는 민간 실손보험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실손보험만으로는 치료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은 이미 여러 차례 지적돼 왔다. ‘공공보험 확대’, ‘급여 항목 재조정’, ‘치료 기준 설정’ 등 여러 방안이 거론됐지만, 실질적인 조치는 나오지 않았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비의료서비스로 설계된 사업인 발달재활서비스 바우처 대상 연령 확대(6세→9세)와 지원 금액 상향(월 22만→25만원) 등을 통해 지원을 늘려가고 있다”고만 말했다. 실손보험은 의료 행위 여부를 기준으로 보장 여부가 판단되는 민간 보험이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하거나 구조를 바꾸는 건 여러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부담은 부모 몫이다. 덕성여대 사회복지학과 김진우 교수는 “이 문제는 복지에만 기댄 제한적 건강 정책의 구조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발달장애 건강 문제를 보건의료정책이 아닌 복지 차원에서만 다루고 있는 것이 근본 문제”라고 말했다. 실제로 정부의 제6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2023~2027)에도 발달지연 아동의 치료 접근성 문제는 포함돼 있지 않다. 건강은 여전히 복지부 장애인정책국 안의 ‘장애인건강과’에서 제한적으로 다루는 문제일 뿐이다. 김 교수는 “진짜 발달장애 국가책임제가 되려면, 돌봄분야뿐 아니라 건강과 보건의료 분야에서도 경제적 부담 없이 적기에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발달장애든 발달지연이든 간에 의사 처방을 기반으로 공공의료체계 안에서 제공되는 명확한 서비스로 재편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입장이다.
◇의료진도 ‘코드의 벽’에 갇혀… “진단보다 중요한 건 조기 개입”
의료계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보호자들이 F코드를 기피하는 배경에는 실손보험의 보장 구조가 있지만, 이를 수용해 R코드 진단을 반복하는 건 결국 현장의 의료진이다. 지난 2021년 육아정책연구소 연구에 따르면, 의사들은 발달지연 아동에게 심화 평가나 정밀 검사를 권고해도 치료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로 ‘부모의 거부감’을 가장 많이 꼽았다. 이는 의료진에게 부담으로 작용해 자폐 여부에 따라 치료 접근이 달라짐에도, 단순한 발달지연(R코드) 진단을 내리거나 정식 진단을 유보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의료계 내부에서도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대한소아청소년행동발달증진학회는 부모단체, 보험사 등과 함께 논의에 나서고 있다. 학회의 한은희 부회장(김포 우리소아청소년과 원장)은 “치료가 진단 코드에 따라 좌우되고, 치료비는 민간실손보험에 의존하는 지금의 구조는 아이들을 치료의 기회에서 멀어지게 한다”며 “진단명보다 중요한 건 조기 개입”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자폐 진단을 9세 이전까지는 유보하며, 조기 개입을 강조하는 추세다. 한 원장은 “두 돌 무렵부터 적극적으로 치료하면 자폐 경향을 보이던 아이들도 정상아로 자랄 수 있다”며 “이를 위해선 아이들이 부담 없이, 제때 치료받을 수 있도록 공공보험 체계 안에서 보장하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코드 논쟁을 넘어서야 한다”며 “정부가 나서서 치료비 급여화를 포함한 공공의료체계를 정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치료 접근성 자체도 개선돼야 한다. 한 원장은 “현행법상 자폐 진단은 소아정신과에만 권한이 있어, 소아과 의사는 실제로 증상을 알고도 정신과로 의뢰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이 같은 분절된 의료체계가 개선돼야 하고, 대학병원 위주의 치료 인프라에도 한계가 있어 지역 중심의 치료기관 확충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피해는 아이가 짊어진다… 더는 미루지 말아야
아이의 발달장애 치료가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좌우돼선 안 된다. 현 체계를 방치하면, 그 모든 피해는 결국 아이가 짊어지고, 사회로 돌아온다. 전문가들은 부모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한 만큼, 국가 차원의 책임 전환과 제도 전반의 근본적인 개편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대한소아청소년행동발달증진학회 박양동 이사장(서울패밀리병원 원장)은 “독일, 미국, 일본처럼 F코드 여부와 상관없이 치료에 제약이 생겨선 안 된다”며 “언어·놀이·행동치료 등 발달지연 치료는 건강보험 급여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급여화를 위해선 신의료기술 평가 등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지만, 관련 논의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박 이사장은 “지금도 수많은 아이가 적절한 조기 개입만 있었다면 일상생활이 가능했을 것”이라며 “정부와 의료계, 보험사가 지금이라도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학회는 제도 개선을 위한 핵심 과제로 ▲건강보험 급여 적용 및 본인부담금 5%로 인하 ▲조기검사 조기중재 및 통합치료시스템 구축 ▲발달장애 치료의 의료전달체계 재정비 ▲장애인진단서 발급 권한에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포함 ▲지역 중심 행동발달증진센터 100곳 이상 확대 등을 제시했다.
민간 보험업계도 변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열어두고 있다. 실손보험 가입자가 가장 많은 현대해상 관계자는 “보장 필요성에 공감하며, 관련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며 “추후 정부와의 연계나 급여화가 이뤄진다면 별도의 담보 상품 개발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메리츠화재도 지난 3월 보험연구원 회의에서 발달지연 아동 치료의 제도적 기반 마련에 공감한 바 있다.
한은희 원장은 “발달지연 치료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숙제”라며 “현장에서는 보험 혜택이 끊길까 봐 수많은 부모가 매일 가슴을 졸이는 절박한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