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화병, 억눌린 우울의 또다른 얼굴​

김병수 김병수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김병수의 우울증 클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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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클립아트코리아
“가슴에서 불이 나요. 속이 꽉 막힌 것 같고, 불덩이 같은 게 치밀어 올라요.”

화병(火病) 환자들이 가장 자주 호소하는 증상이다. 내시경을 하고 정밀검사를 받아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 증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몸이 아프니 환자는 병원을 찾아다니고, 검사 결과가 정상이면 ‘혹시 의사가 진단을 잘못한 건 아닐까’ 의심도 한다. 처음에는 내과나 가정의학과를 찾다가, 나중에서야 “정신과에 한 번 가보세요”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환자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마음이 아픈 게 아니라, 몸이 아파요.”

진료실에서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의사가 “심리적 요인 때문일 수 있습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해도 환자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다 정신과 의사가 “화병입니다”라고 하면 그제서야 환자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억울함과 분노, 서운함과 배신감 같은 감정을 오래 눌러 놓은 끝에 생긴 병이라는 설명이, 어쩐지 마음을 위로해주는 듯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누군가 알아봐 준 것 같다는 느낌 때문에 환자는 이 진단에 동의하게 된다.

화병은 억울함, 분노, 서운함, 서글픔과 같은 감정을 오랫동안 마음속에 눌러두고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 생기는 정신질환이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관찰되는 정신질환으로, 문화적으로 형성된 독특한 증후군이다. 실제 임상에서는 우울증의 변형된 형태로 보는 경우가 많다. 우울감, 식욕 저하, 불면 등의 전형적인 우울 증상에 더해, 가슴 두근거림, 명치가 막힌 느낌, 온몸이 아픈 증상 등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우울증 증상이 현저하다면 화병이 아니라 공식적으로는 우울장애라고 진단한다. 신체증상과 이것에 관한 집착이 환자의 주된 호소라면 신체증상장애(somatic symptom disorder)라고 진단될 수도 있다. 6개월 이상 지속되는 신체증상이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이에 대해 과도하게 걱정하거나 집착하면 신체증상장애 붙는다.

화병이 우리나라 중년이나 노년 여성에게서 흔한 이유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 전통적인 문화의 영향이 크다. 남편이나 시댁과 갈등을 겪어도 ‘내가 참고 견뎌내야만 한다’라고 여기거나 ‘나 하나만 참으면 우리 가족이 다 평화로울 수 있다’라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살고, 이것이 화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화병의 핵심은 ‘감정의 억제’에 있다. 억눌린 감정들이 머리가 아프다, 심장이 쪼여든다, 소화가 안 되고 속이 답답하다 등의 신체 증상으로 변화되어 표출되는 것이다. “나는 우울하지 않다. 우울증이 아니다”라고 부인하고 “이 나이에 내 마음 하나 추스르지 못하겠냐”라며 정서적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화병 환자 중에는 자신의 감정을 잘 인식하거나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표현불능증(alexithymia)’을 가진 사람도 많다. 자기 감정을 인정하지 않거나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정서적 고통을 인식하고 언어화하지 못 해, 그 감정이 신체증상으로 표출된다. “나는 힘든 것이 없다. 모두 내려놓아서 마음에 담아둔 것이 없다”라고 자기감정을 방어하고 합리화하기도 한다. “나는 아무렇지 않아요” “마음에 담아둔 거 없어요”라고 말하지만 몸은 이미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이 증상을 우울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신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일반적으로 우울증 치료에서 사용되는 항우울제가 화병에도 똑같이 사용된다. 특히 우울증상이 현저하다면 항우울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항우울제는 단순히 우울감만을 완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신체 통증이나 증상에 대한 집착을 완화시키고, 동반된 불안 증상까지 함께 다스릴 수 있다. 신체 증상에 민감한 환자들이 많기 때문에 초기에는 보통 용량의 절반 이하로 시작해 천천히 증량하는 것이 좋다. 증상이 나아졌다고 해서 바로 약을 끊기보다는 충분한 기간이 지난 후 서서히 감량하는 게 좋다. 증상이 지속되거나 재발과 악화가 반복된다면 항우울제를 장기간 유지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항우울제로 환자가 호소하는 신체 증상만을 없애는 게 치료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환자의 일상 및 직업, 대인 관계 기능을 회복하는 데 진료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마음의 병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라는 말은 환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검사에서 이상 없으니 아무 문제 없습니다”보다는 “증상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스트레스나 감정이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라고 설명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의지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병이 된 것이므로 가족들도 “성격 문제야” “정신력이 약해서 그래” 같은 말은 삼가야 한다. 그보다는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그랬을까”라며 공감해주는 태도가 필요하다.

약물치료와 함께 심리치료도 필수다. 억눌린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울감은 표현하지 않으면 병이 된다. 억누른 울화는 결국 몸으로 드러난다. 방치하면 우울증으로 깊어진다.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말해도 괜찮다고, 울어도 괜찮다고, 환자가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자신의 감정을 말로 풀어내도록 격려하고, 말이 어렵다면 노래를 부르거나, 운동으로 땀을 흘리는 것과 같은 간접적인 표현도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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