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질환

"HPV 백신 무료 접종, 남성까지 확대해야… 두경부암 예방에 도움"

이해림 기자

한국MSD ‘HPV 백신 접종을 통한 남녀 암 예방’ 기자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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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병원 이비인후과 이세영 교수​/사진=한국MSD 제공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인유두종바이러스(HPV) 백신 무료접종을 12세 이상 남성까지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무료접종을 약속한 백신은 ‘가다실 9가’다. 현존하는 HPV 백신 중 가장 많은 HPV 유형을 예방할 수 있지만, 접종비가 비싸다. 비급여 항목이라 총 3회 접종에 60~72만원이 필요하다.

현재 국가예방접종(NIP)에 HPV 백신이 포함돼있긴 하지만, 12~17세 여성청소년과 18~26세 저소득층 여성만 접종비 지원 대상이다. 지원하는 백신의 가수도 2가(서바릭스), 4가(가다실 4가)로 낮다. 한마디로 예방 효과가 비교적 떨어지는 백신만 국가가 무료로 지원한다는 것인데, 이마저도 남성은 지원 대상이 아니다. HPV 백신 무료 접종 대상을 12세 이상 남성까지 확대하겠다는 공약도 원래라면 올해 상반기에 시행됐어야 하나 아직 진척이 없다. HPV 백신이 여성 자궁경부암 예방 효과를 보이는 것만큼 남성 두경부암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간과돼서다.

전문가는 정부가 HPV 백신 국가예방접종 대상을 남성으로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27일 오후 서울스퀘어에서 열린 ‘암 예방을 위한 HPV 접종 확대 기자간담회’에서 중앙대병원 이비인후과 이세영 교수는 “HPV 백신을 맞으면 암을 예방할 수 있는데, 이를 국가에서 무료 접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미래세대에 대한 정부의 직무유기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HPV 감염, 남성 두경부암 환자 늘리고 있어
HPV 바이러스 유형은 현재까지 약 200개가 알려졌다. 대부분 감염 후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자연스레 없어지지만, 일부가 지속적 감염을 일으켜 암을 유발한다. HPV는 여성 암의 일종인 자궁경부암을 유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HPV 바이러스 감염만 예방해도 자궁경부암 발생을 거의 막을 수 있다.

자궁경부암과 반대 상황에 있는 게 두경부암이다. HPV로 인한 두경부암은 여성에게도 생기지만, 남성 환자가 훨씬 많다. 두경부암은 뇌 아래에서 가슴 윗부분 사이인 ‘두경부’에 생긴 암을 말한다. 담뱃갑에 있는 암 병변 사진 대부분이 두경부암이다. 50세 이상 남성들에서 주로 발생하며, 환자 수도 많은 편이다. 2019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남성 두경부암 사례는 4306건으로 전체 남성 암 중 7위를 차지했다.


HPV 감염은 술담배 이외에 두경부암 주요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2007년 국내 자료에 의하면 두경부암 중 구인두암의 73.1%, 구강암의 36.1%가 HPV와 관련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후두암은 흡연과 관련 있지만 HPV와는 별 관련 없다고 알려졌다. 이세영 교수는 “두경부암 환자 수가 계속 증가하는 추세인데, 후두암 환자 수는 일정하고 구인두암과 구강암 환자 수가 특히 늘어난다는 건 두경부암 증가 추세를 HPV 감염이 견인하고 있다는 뜻”이라며 “남성도 암 예방을 위해 HPV 백신을 접종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백신, 두경부암 예방에 도움… 입증 시간 필요
여성 자궁경부암과 달리 남성 두경부암이 외면받는 원인은 연구의 시간적 한계에 있다. HPV 감염이 두경부암을 유발한다고 볼 근거가 충분하지만, HPV 백신 접종이 두경부암 예방 효과를 보인다는 것을 ‘아직’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HPV에 감염됐다고 해서 질환이 바로 생기지는 않는다. HPV로 인한 암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지 약 20년 후에 생긴다. 성기 사마귀는 2~3년 정도다. 다행히 자궁경부암은 본격적인 암이 되기 이전 상태인 ‘전암병변’ 단계를 검사로 진단할 수 있다. HPV 백신 접종이 전암병변 발생을 얼마나 막아주는지를 통해 자궁경부암 예방 효과를 가늠하면 된다. 그러나 두경부암은 전암병변도 없고, 공식적인 선별검사도 없다. 첫 접종 후 20년이 지나기까지 기다려야 예방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2030년쯤은 돼야 이것이 가능하다. 이 교수는 “자궁경부암은 병변이 가로로 편평해 병변 주변을 긁어서 조직검사가 가능하지만, 구인두암은 병변이 수직 주머니 모양으로 생겨서 주변 조직을 긁어서 진단하는 게 불가능하다”며 “시간적 한계로 HPV 백신의 두경부암 예방 효과에 관한 연구가 아직 없을 뿐, 학계에선 HPV 감염을 차단하면 두경부암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OECD 가입국 73%, 남녀 모두에 9가 지원 “한국도 따라야”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38개국 중 33개국이 남녀 모두에게 HPV 접종을 국가예방접종으로 지원하고 있으며, 이 중 28개국은 남녀 모두에게 9가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OECD 가입국 중 2가 또는 4가 백신을 여성청소년에게만 무료 지원하는 국가는 한국, 멕시코, 코스타리카 3개국뿐이다.

백신은 무료 접종을 시행했을 때 국가적 이득이 있는지 경제성 평가를 거쳐 국가예방접종에 추가된다. 국내에선 아직 경제성 연구 결과가 나오진 않았지만, 해외에는 경제성 평가 결과 남성의 HPV 접종에 이득이 충분하다고 판단해 국가예방접종에 추가한 나라들이 있다. 복잡한 경제성 평가를 생략하고 정책 형평성에 따라 남성도 HPV 백신 무료 접종 대상에 추가한 국가들도 있다. 이세영 교수는 “HPV 백신을 국가예방접종에 도입한 나라들은 보통 4가 백신을 여성에게 우선 지원하다가 남성의 두경부암 발생률이 증가해 4가 접종을 남성으로도 확대한 후, 나중에 나온 9가 백신은 남녀 모두에게 지원하는 과정을 밟아왔다”며 “한국은 HPV 백신의 국가예방접종 진입이 늦은데다 이미 9가 백신이 나와 있으니, 4가 백신 접종을 남성으로 확대하는 중간 단계를 건너뛰고 9가 백신을 곧바로 남녀 모두에게 지원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