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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대한다, '사람'이 삭제된 의학을

김동석 춘천예치과 대표원장·작가

김동석의 의료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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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립아트코리아 제공
“아니 아무런 이상이 없다니요? 내가 아픈데, 내가 못 살겠는데 검사 결과가 괜찮다고요? 치료해줄 것이 없다고요?” 누구나 한 번쯤은 의사에게 이런 하소연을 해보았을 것이다. 과연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현대 의학으로는 의사도 모르는 또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일까? 현 의학적 소견으로 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의사를 믿지 못하고 불만을 토로하면 의사는 자연스럽게 환자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기도 한다. 과연 이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치료일까 위로일까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 있는 걸까?

1543년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을 냈다. 이를 통해 너무나 당연히 믿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인 천동설을 뒤집었다. 같은 해에 의학에서도 비슷한 혁명적인 책이 나온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1514~1564)의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라는 책은 오랜 기간 정설로 여겨졌던 2세기 로마 의학자 갈레노스(Claudios Galenos)의 해부학적 지식에 오류가 많음을 지적했다. 갈레노스는 로마의 검투사들을 치료하면서 인체 내부구조에 관심을 가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주로 동물실험, 특히 원숭이 해부를 통해 지식을 얻었다. 동물과 사람은 구조가 다르므로 당연히 잘못된 지식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1400년 넘게 천동설만큼이나 갈레노스의 의학은 확고했다. 14세기 이후에 이탈리아에서 시체 해부가 허용되면서 부분적으로 갈레노스의 의학이 잘못되었다고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누구도 감히 대가에 반하는 불경함을 범하기 싫어했다. 인체 해부를 통해 자신의 연구결과를 책으로 발표한 베살리우스는 직접 관찰하고 경험한 것이 정확한 지식임을 보여주었다.

1660년 영국에서는 왕립학회가 결성되어 과학에 관한 토론의 장이 만들어졌다. 당시만 해도 과학계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많은 학자가 자신을 ‘과학자’가 아닌 ‘자연철학자’라고 불렀지만, 점차 학문의 발달로 ‘과학’이라는 용어가 보편화되고 이 학문으로 세상이 바뀌기 시작한다. 과학적 연구방법을 통한 의학의 발전은 놀라웠다. 1796년 제너의 종두법, 19세기 파스퇴르와 코흐에 의한 전염병 원인과 예방법 발견, 20세기 각종 첨단 약물 개발 등등. ‘과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면서 가장 중요시하게 된 것은 ‘객관화’, 즉 근거에 기초한(Evidence based) 의학이었다. 맥박, 혈압, 체온 등을 측정하는 일이 보편화되었고, 나노 단위까지 미세한 물질의 검출이 가능해지면서 무엇이든 관찰하고 측정했다. 그 결과 환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의사는 환자의 이야기를 듣기에 집중하기보다는 환자의 몸에서 찾을 수 있는 보이는 이상소견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과학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의학은 인간이 아닌 질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의학의 중심은 ‘병’이 아니라 병든 ‘사람’이고 아무리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도 진단을 할 수 없는 질병은 아직도 많다. 지난 세기 동안 비약적 발전을 이룬 의학지식과 기술은 수많은 질병을 정복했지만 질병 중심의 의학은 그 근본에 있는 사람 자체를 홀대하고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Hospital(병원)의 라틴어 어원은 hospitalia로 ‘낯선 사람들을 재워주는 숙소’였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낯선 사람을 편하게 재워주고 후대하는 풍습이 있었다. hospitality가 그래서 ‘환대’란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병원(病院)의 어감은 왠지 ‘병을 다루는 곳’이라는 가치 중립적인 의미 이외의 뜻을 찾기 어렵다. 사람이 중심이 아닌 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개념적으로 들여다보면 과학실험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조선 시대의 병원은 ‘사람을 살리는 곳’이라는 뜻의 ‘활인원(活人院)’이었다. 단순히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닌 사람을 총체적으로 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적은 비용으로 많은 것을 생산하는, 경제학이나 공학에 기반을 두어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경영방식은 ‘과학경영(Scientific Management)’으로 가치의 기준이 생산성과 비용이다. 과학경영은 직원이나 고객도 생산과 판매를 위한 수단과 도구로 인식한다. 반면에 인문 경영(Humanities Management)은 사람이 중심이다. 가치의 기준이 사람들의 삶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영관을 나타내는 말이 다름 아닌 경제(經濟)다. ‘세상을(世) 경영해(經) 사람을(民) 살린다(濟)’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약자인 것이다. 경영의 본질이 효율이나 수익이 아닌 구제나 살리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병원은 과학경영을 상징하고 있고 활인원은 인문 경영을 대변하는 말처럼 들린다. 과학경영에서는 가치보다는 과학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따라서 가치 지향적인 인술보다는 가치 중립적인 전문적 기술이 강조된다.

의사는 과학적이고 근거 있는 치료에 관심이 있지만 실상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문제는 아주 근원적 인간의 특질이다. 건강에 대한 욕구, 젊음에 대한 동경, 질병에 대한 걱정, 죽음의 공포, 늘 품고 있는 탐욕, 집단과 개인의 상충, 경제적인 어려움에 대한 고민 등. 사실 해부학적인 인간은 모두 거의 유사하지만 정서적인 인간은 비슷할 수가 없다. 의사가 해부학적인 인간을 치료한다면 오히려 쉽다. 하지만 늘 정서적 인간을 치료한다. 인문학은 그래서 필요하다. 인문학도 과학과 마찬가지로 의사에게는 하나의 ‘도구’다. 과학과는 좀 다르다. 인문학은 환자가 비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통해 환자에 대한 공감 능력을 높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 말에 동의하지만, 공감이라는 말에 머무르기만 하는 것은 틀렸다. 인문학적 소양이 충분한 의사는 공감할 수 있고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대부분 나와는 너무나 다른 사람한테는 공감을 하지 못한다. 입이 거칠고, 폭력적이고, 비협조적인, 어떤 면으로도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을 앞에 두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시 말해 의학에서 인문학을 강조하는 것은 감정에 도취되자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공감을 잘하는 친절한 의사, 말이 잘 통하는 환자를 만들자는 것도 아니다. 그 이상이다. 의사로서 보건의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긴 안목과 통찰력을 가지고, 성찰할 줄 알고, 그에 대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환자는 의사를 믿고 또한 그가 치료하는 로봇이 아닌 사람임을 인정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정서적인 교감, 자기 성찰을 중요시하지 않는, 내부만 들여다보는 개인주의적인 문화에 대한 저항력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저 병을 치료하는 의사로 과학적 사고만으로 환자를 치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의사는 병이 아닌 사람을 살리는, 과학적이고 근거에 기초한 치료를 넘어서 활인(活人)을 해야 하는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다. 의사도 환자도 모두 인간이다. 인문학이 의료에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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