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를 질병으로부터 예방하고 건강을 회복하게 하기 위한 보건의료는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그 중 지난 20년간 보건의료 분야의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의료오류가 어떻게 발생하며, 이로부터 환자의 위험을 어떻게 예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안전과학(safety science)에 대한 지식의 발전일 것이다.
현대의 환자안전을 위한 노력은 1999년 미국 의학원(Institute of Medicine)에서 발간한 보고서 ‘To Err is Human’에서 발표한 의료오류에 관한 자료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매년 의료오류로 사망하는 미국인의 수가 4만4000명에서 9만8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었는데 이는 자동차 사고 사망자 수보다 더 많은 수준으로, 의료서비스 제공 과정에서 훨씬 많은 오류가 발생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환자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법적 규제 강화, 의료장비전산시스템 등 첨단 기술 도입, 임상가이드라인 제공, 조직구조 개편 등 다양한 노력을 시도해 왔으나 획기적으로 환자의 안전이 확보되지는 못했다. 보건의료 전문가들 사이에서 환자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환자안전문화를 창조할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실수한 개인을 비난만 하는 문화에서 실수를 통해 위험을 예방하고 시스템을 개선하는 문화로 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화란 여러 가지 구성요소가 어떤 특정한 체제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고 전달됨으로써 학습된 행동 및 행동 결과의 통합된 형태로, 어떤 집단의 전부나 일부에 의해 공유된 것을 말한다. 의료서비스 제공 과정에서 예방 가능한 의료 오류로부터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환자의 안전을 최우선의 중요한 가치로 두는 즉, 환자안전문화가 구축된 의료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의료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분야이므로 개인의 실수에 대해 매우 엄격하며 전문가 집단의 자체 규율이 매우 강한 편에 속한다. 필자가 직접 의료기관에서 발생한 의료 오류를 분석하고 그 근본원인을 개선하는 업무를 진행하면서, 순수하게 개인의 잘못만으로 환자의 안전에 문제가 발생한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의료가 제공되는 모든 과정은 복잡한 시스템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시스템의 개선 없이는 의료인 개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안전한 의료 환경을 구축할 수 없다. 이 시스템에는 의료인 개인, 의료기관, 의료기기 및 제약 업체, 보건의료제도, 정부, 의료 소비자 등 모두가 포함된다.
우리나라도 국민들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일환으로 2016년에 환자안전법이 제정되었고, 이를 통해 국가환자안전위원회 설치, 환자안전사고의 자율 보고, 환자안전 전담인력 배치 및 환자안전위원회 설치 등 제도적인 장치의 마련이 시작되었다. 이제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의 면면을 의료 소비자들과 함께 진지하게 들여다 보고 환자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해결책을 함께 모색해 나가는 것이 필요할 때이다. 2021년 7월에 발표된 OECD 보건의료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외래 진료 회수는 연간 17.2회로 OECD 국가 중 가장 많은(OECD 평균 6.8회)반면, 임상 의사와 간호사 수는 각각 인구 1000명당 2.5명과 7.9명으로 OECD 평균보다 적다. 이는 적은 의료인이 많은 수의 환자를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3시간 대기, 3분 진료’라는 우리나라 대형병원의 현실과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고 식사도 거르며 환자를 간호하고 있는 우리나라 간호의 현실을 보여준다. 이런 환경에서는 의료인 개개인이 아무리 주의를 기울이고 안전을 위해 노력한다고 해도 의료오류는 발생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의료오류가 발생했을 때 개별 의료인이나 의료기관을 비난하고 처벌하는 접근법을 취해 왔으나 이러한 방법으로는 환자에게 안전을 보장하는 의료환경을 구축할 수 없다. 의료 환경 저변에 깔려있는 안전하지 못한 근원적인 제도와 시스템을 찾아 정부, 의료기관, 의료인, 의료소비자가 모두 참여하여 하나씩 바로 잡아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있다. 안전을 담보한 의료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안전관리 비용이 지출될 수 밖에 없다. 나와 우리 가족의 안전을 위한 안전관리 비용 지출에 대해서 의료 소비자들도 적극 동참하여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되길 바란다. 의료비 증가가 결코 단순 지출이 아닌 나와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는 비용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환자의 안전을 최우선의 중요한 가치로 두는 환자안전문화 조성은 단순한 대국민 캠페인이나 행사로 조성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환자의 안전이 중요하다는 인식과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제도가 수레의 양 바퀴처럼 굴러가야 진정한 환자안전문화가 조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도 의료현장에서는 급변하는 코로나 상황과 확진자 증가에 맞서 열악한 환경에서도 최후의 방어선이라는 사명감으로 버티고 있는 많은 의료인이 있다. 우리 국민 모두가 환자안전문화가 조성된 환경에서 안전하고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의료 생태계를 함께 가꾸어 나가길 희망한다.
─대한환자안전학회는 2012년에 시작한 환자안전연구회의 활동을 바탕으로 2015년에 설립되어 우리나라 환자안전의 향상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환자안전에 대한 더 많은 정보와 학회 사업, 활동이 궁금하시다면 <대한환자안전학회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