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과

[메디컬 현장] 건강한 똥을 이식… '만병치료제'로 떠오른 대변

전혜영 헬스조선 기자

클로스트리디움 디피실 감염증에 적용… 자폐증·당뇨병·비만 효과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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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이동호 교수/사진=분당서울대병원 제공

"모든 질병은 장(腸)에서 시작된다"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이미 기원전 400년경에 장 건강의 중요성을 암시했다. 21세기 현대 의학에 들어서야 그가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가 차츰 밝혀지고 있다. 바야흐로 '미생물'의 시대, 최근엔 건강한 사람의 대변을 이식해 질병을 치료하는 '대변이식술'도 상용화됐다. 인류가 지금껏 '찌꺼기' '노폐물' 정도로 하찮게 여기던 대변이 이제는 치료제가 된 것이다. 국내서 선도적으로 대변이식술을 도입한 분당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이동호 교수를 만났다.

◇건강한 대변 속 '유익균', 환자 장으로 이사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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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이식술은 대장내시경을 통해 용액을 고르게 분사하는 방법으로 이뤄진다./사진=분당서울대병원 제공
대변이식의 원리는 간단하다. 건강한 사람의 대변을 정제해 유익균이 응집된 용액으로 만든 뒤, 내시경을 통해 환자의 우측 대장에 골고루 분사한다. 그러면 장에 유익균들이 터를 잡고 살면서 건강한 장으로 거듭난다. 이동호 교수는 "건강하지 못한 장내 환경은 나무가 다 타버린 열대우림과 같다"며 "건강한 미생물을 통째로 옮겨주면 알아서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며 건강을 회복시켜 준다"고 말했다. 실제 대변이식술을 받은 '클로스트리디움 디피실 감염증' 환자의 장에는 2~3일 만에 유익균이 자리 잡으며 염증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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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증받은 대변은 섬유질과 유해균을 제거하는 특수 처리 과정을 거친다.(아래)대변은행에서는 정제한 대변 용액을 영하 60도에 냉동보관하고 있다./사진=분당서울대병원 제공

대변이식술에 사용되는 용액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혈보다도 엄격한 기증 과정을 거친다. 혈액검사를 통해 간염이나 매독 등 바이러스가 없는 건강한 사람인지 확인하며, 최근에는 만약에 대비하기 위해 코로나19 감염 여부도 확인한다. 과거엔 대변이식이 필요한 환자의 가족에게 기부를 권유하곤 했다. 이동호 교수는 급하게 수술이 필요한 환자에게도 적용하기 위해 '대변은행'을 설립했다. 대변은행에서는 미리 기증자에게 대변을 받아 찌꺼기나 유해균을 제거하는 특수 처리 과정을 거친다. 세균에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영하 60도에 보관했다가, 시술 6시간 전에 해동해 사용한다.

◇항생제 안 듣는 장염, 대변이식술로 80% 치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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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생제 장염 환자에게 대변이식술을 시행하면 2~3일 만에 염증이 사라진다./사진=분당서울대병원 제공

국내서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대변이식술 적응증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직까진 클로스트리디움 디피실 감염증뿐이다. 주로 항생제 사용과 관련돼 발생하며 장에 심각한 염증을 유발하는 병이다. 이름만 들어선 생소하지만, 미국에선 해마다 50만명, 국내선 1만명의 환자가 발생할 정도로 의외로 흔한 질환이다. 사망률은 6.8%, 치료해도 30%가 재발하고, 노인과 면역저하자에서는 60%가 재발하는 무서운 병이다. 항생제에도 반응이 없어 치료가 어렵지만, 대변이식술을 시행하면 예후가 매우 좋다. 이동호 교수가 현재까지 시술한 약 70례 중 성공률은 80%에 달했다.

부작용은 없을까. 국내에서는 복통, 복부팽만감 등 가벼운 부작용 외에 심각한 부작용 사례는 한 건도 없었다. 다만, 해외에서는 한 건의 안타까운 사망 사례가 있었다. 강력한 항생제에도 죽지 않는 '슈퍼박테리아'에 감염된 환자의 대변이, 하필이면 면역력을 억제하는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에게 이식된 것. 이동호 교수는 "아직 국내에서는 면역억제제 복용 환자에겐 대변이식을 하지 않고 있다"며 "만약 앞으로 하게 된다면 필수적으로 슈퍼박테리아 검사를 해야 한다는 교훈을 알려준 사례"라고 말했다.

◇불치병 해결의 열쇠? 미생물, '만병통치약'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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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을 이용한 치료가 장 질환을 넘어 전신 질환에 이용될 것으로 기대된다./사진=클립아트코리아

대변이식술이 아직은 클로스트리디움 디피실 감염증에 한해 시행되고 있지만, 앞으로 다른 장 질환이나 전신 질환에까지 적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동호 교수는 "임상 연구에서는 궤양성대장염, 과민성장증후군 등 치료에 쓰인다"며 "해외에선 자폐증, 당뇨병, 비만, 치매, 파킨슨병 등 다양한 질환 치료를 위해 연구 중이다"고 말했다. 최근엔 암 환자 중 면역치료제가 듣지 않는 환자나, 코로나19 등 감염병 치료까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리란 임상 연구들이 나오면서 더욱 기대를 모은다.

현대에 들어 의학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지만, 아직도 원인과 치료법을 밝히지 못한 질병이 많다. 오히려 늘어나는 질환도 있다. 염증성 장질환, 대장암, 유방암, 전립선암 등은 은 과거 한국인에게는 드문 병이었지만 최근 들어 발병률이 급증했다. 서구화된 식습관으로 한국인의 장내 미생물이 황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장내 미생물만 개선해도 만병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아직은 매우 효과적인 유익균을 온전하게 키워 장까지 보내는 기술이 부족하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 이를 가능케 할 차세대 미생물이 등장한다면 '만병치료약'으로 거듭날지 모른다. 이동호 교수는 "기존까지 약은 단순한 화학물질에 불과했지만 앞으로는 미생물, 즉 살아있는 생물이 병을 치료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며 "이를 기반으로 한 생채유래약물(LBP, Live biotherapeutics product)에 주목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