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칼럼
[이해나 기자의 정신건강 테라피] "저는 우울한 기질을 타고났어요"
이해나 헬스조선 기자
입력 2018/12/05 09:19
"저는 우울한 기질을 타고났어요. 어릴 때부터 항상 우울했던 것 같아요. 유전될까 봐 아이 낳기도 겁나요."
타고나기를 우울한 성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이에 대한 논란은 꾸준하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같은 종류의 상담 글이 넘친다. 댓글에는 "우울한 성향은 유전이 확실하다" "유전과 환경이 반반으로 작용한다" "나도 그런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등 다양한 의견이 줄을 잇는다. 안타깝게도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은 없었다.
기자도 궁금했다. 다행히 그간 취재를 하며 연을 맺었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의 자문을 구할 수 있었다.
의사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태어나면서부터 우울한 사람은 없습니다"였다.
전문의들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이 우울한 기질을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재 '우울증'이거나 '기분부전장애(지속적기분장애)'를 앓고 있을 확률이 높다.
우울증이 있으면 과거 행복했던 기억보다는 우울했던 일만 강조해서 기억, 실제와 달리 자신이 원래부터 우울했다는 일종의 '과거 회상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서울의료원 정신건강의학과 이해우 과장은 "태어날 때부터 우울한 걸 누가 알 수 있나요? 현재 우울한 기분에 기반해 과거를 판단하고, 자신은 원래 우울했던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죠"라고 말했다. 기분부전장애는 일종의 우울증 전 단계다. 가벼운 우울 증상이 계속 지속된다.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백종우 교수는 "길게는 2년씩 이어진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기분부전장애를 질병 카테고리에 넣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정신과 학계에서는 이를 일종의 치료 대상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자신이 우울한 기질 탓에 고달픈 사람은 이를 '성향'으로 여기고 방치하기보다 개선이 필요한 가벼운 우울증으로 보는 게 낫다. 정신건강의학과를 찾는 게 부담스럽다면 심리상담센터를 먼저 찾는 것도 방법이다. 용기가 있다면 병원을 찾아 증상에 대해 상담하고 약을 먹지 않더라도 의사와 함께 해결책을 고민해볼 수 있다.
유전 문제는 어떨까? 의사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부모가 우울증에 걸렸다고 해서, 그 유전자가 아이에게 전달되고, 아이가 그 유전자로 인해 우울증에 걸리는 일은 없다. 문제는 부모가 우울증을 치료하지 않은 채 자녀를 키워 양육 과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데 있다. 비만인 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는 살이 찌기 쉬운 부모의 식단을 공유하면서 비만이 되기 쉬운 것과 비슷한 원리다. 서울청정신건강의학과 정동청 원장은 "부모가 우울해 삶이 무기력한 것이 자녀의 우울감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부모가 우울증이 있으면 유전적으로 남들보다 우울증에 취약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아이를 갖지 않으려는 생각에 대해, 백종우 교수는 "부모가 자신의 고혈압이나 당뇨병이 유전될까 봐 아이를 안 낳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한편 자녀에게 우울감이 유전될까 봐 두려움을 느낄 정도면 이미 우울증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일 확률이 크다. 자신의 우울증 진단을 먼저 시도해보는 것이 낫다.
온라인상 간혹 이런 글도 눈에 띄었다. "나는 어릴 적 너무 행복하게 자랐다. 화목한 가정과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며 부족한 것 없었다. 하지만 우울감이 심하다. 내재된 타고난 기질인 것 같다."
완벽한 환경과 행복의 기준은 무엇일까? 전문의들은 완벽한 환경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가족이 주는 충분한 사랑, 경제적 여유로움 등 겉으로 봤을 때 완벽해 보이는 조건들도 사실 완벽하지 못하다. 자신의 정서를 건드리고 위축시키는 일은 예상치 못한 것에서 발생될 수 있다.
백종우 교수는 "과거 우울증이 잘 생기는 성격에 대한 수 없이 많은 연구가 이뤄졌다"며 "그런데 그에 대한 결론은 '누구에게든 생길 수 있다'였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사랑을 많이 받고 안 받고 등에 관계없이, 누구든 예상치 못한 일로 우울증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울증은 타고나는 게 아니며, 우울증이 잘 생기는 성격도 없다. 자신의 기질을 탓하며 우울한 인생의 옷자락에 끌려다니기에 삶은 너무 짧다. 자책은 우선 뒤로 하고, 심리상담, 약, 운동 등으로 도약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해나 헬스조선 기자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은 시기다. 아니 과거에도 많았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병원을 찾자니 용기가 나지 않고, 주변에 묻기도 애매해 혼자 삭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 이들의 심리적 평온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취재하고 공유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