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맛집
호이안… 베트남 답거나 답지 않은
글 권오혁(베트남 현지 여행전문가) | /사진 권오혁, 셔터스톡, 헬스조선DB
입력 2018/01/27 08:00
힐링스토리
아름답고 매력적인 도시 호이안은 내게 있어 배낭을 멘 여행자와 같은 곳이다. 밤거리에 은은하게 스며드는 홍등처럼 호이안의 밤거리는 내 삶을, 내 인생의 책 한 페이지를 꿈으로 채워준다.
꿈을 좇아 여행을 떠나다
일전에 회사일로 알고 지내던 거래처 직원이 있었다. 늘 책상 한쪽에 각종 여행 관련 책자들이 즐비한 그 직원의 책상은, 업무 관련 책들이 겹겹이 놓여 있던 동료들의 치열한 책상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하루가 길게 느껴지던 어느 날, 전화벨이 울렸다. 낯선 번호는 받지 않는 습관이 있는데 무심결에 받은 수화기 너머에선 오래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직원이었다. 어찌 연락했는지 물어보니 우연히 내 블로그를 보았단다.
기억 한편에 색다른 인상으로 어렴풋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 연락을 받으니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기분이 묘했다. 반가운 마음에 안부를 물었더니 지금 남미에 있다고 했다. 현재 수개월째 여행 중이고 아직 1년 정도 더 여행하려고 한단다. 그러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여행 경비가 떨어져 한국에 있는 차를 팔아 경비 마련을 해야겠다며 해맑게 웃는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문득 이전 그의 여행 책자 가득하던 책상이 떠올랐다. 입버릇처럼 ‘인생에 언젠가 한번쯤은 돌아올 것을 기약하지 않고 떠난다’는 말을 하더니만 결국 떠났구나.
당시 나는 베트남 호이안에 체류 중이었다. ‘여행 계획에 베트남이 있느냐’고 물어보니 맛있는 쌀국수 한 그릇 사줄 요량이면 생각해보겠단다. 넉넉하게 ‘그러겠노라’ 하고 웃으며 유쾌하게 전화를 끊었다. 찰나일지라도 마음속에 스며든 순간은 인생이라는 책에서 하나의 문장이 되고 추억이 된다. 그렇게 모인 추억은 살아가는 데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고, 내일을 희망하는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꿈을 꾸는 데 돈이 들지 않는다, 물론 꿈을 실현하기 위해선 돈이 들겠지만. 꿈을 실행하고 있는 이를 만나서일까. 나도 모르게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나 역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지 않고 무작정 여행을 떠났고, 지금은 이곳 호이안에서 머무르고 있으니까.
동서양이 혼재된 매력의 도시 호이안
수년간 베트남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면서 참 많은 여행객을 만났다. 연인끼리, 가족끼리, 친구끼리 때론 혼자서. 그들의 모든 여행에는 각기 다른 빛깔의 행복함이 있다. 어떤 이는 마치 시험을 보듯 연신 “바쁘다, 바뻐!”를 외치며 한국에서부터 계획한 여행 포인트를 정복(?)한다. 또 어떤 이는 ‘아, 저럴 거면 왜 여행을 왔을까?’ 싶을 정도로 허름한 카페에 앉아 낮에는 커피를, 밤에는 맥주를 시켜 놓고 지나가는 사람과 오토바이만 구경하며 하염없이 망중한을 즐긴다.
누구의 여행이 정답인지, 누구의 여행이 더 바람직한지 논하는 건 의미가 없다. 어떤 곳에서 자든, 무엇을 먹든,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하든 자신의 여행이 즐거우면 그게 정답이고 그게 여행이다. 정답이 없는 여행,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거리만 바라보아도 행복한 곳. 그곳이 바로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호이안이다.
호이안은 과거 베트남의 수도던 ‘후에’와, 바닷가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는 ‘다낭’ 아래 투본강을 끼고 있는 베트남 중부의 작은 도시다. 베트남 최대 도시이자 경제 중심지인 ‘호찌민’, 베트남의 수도이며 정치·문화의 중심지인 ‘하노이’, 그리고 신비스러운 바다 풍광을 가진 ‘하롱베이’ 등과 비교하면 초라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 17~19세기 무역상들에게는 네덜란드, 포르투갈, 마카오, 중국,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의 요충지였다. 이런 이유로 호이안은 베트남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 서양 문화가 많이 남아 있고 이후 중국과 일본 상인들이 정착해 동양적인 색채도 짙게 배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이 주둔 던 곳이라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낯섦 속에서 익숙함을 찾아 호이안에 머물다
개인적으로 베트남에서 가장 사랑하는 도시 중 하나가 바로 호이안이다. 특히 호이안의 밤을 사랑한다. 이곳의 밤은 호이안답다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하기 힘들다. 특유의 고풍스러움에 몽환적인 분위기가 더해져, 마치 술 한잔 하고 난 후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아스라함이 떠오른다. 호이안의 밤거리를 거닐면 베트남의 또 다른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베트남 하면 떠오르는 번잡스러움과 시끄러움은 거리를 붉게 물들이는 홍등의 불빛과 코발트빛 밤하늘에 묻힌다. 형형색색 등불이 켜진 몽환적인 거리에서 추운 겨울밤에 눈이 소복이 쌓인 경복궁 돌담길을 걷는 아련함이랄까. 지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호이안의 밤거리엔 넉넉함이 묻어난다.
처음 베트남에 정착해서 생활할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 아닌가. 신기하고 낯설던 이곳에서의 생활은 이내 익숙함으로 바뀌었고, 그 익숙함이 타성에 빠질 무렵 무작정 떠난 베트남 종단 여행에서 호이안을 만났다. 하릴없이, 목적 없이 그저 도시와 도시를 기차로, 버스로, 오토바이로 내달리며 마음에 들면 쉬어가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음날 바로 떠나는 패턴의 여행에서 유일하게 ‘아, 이곳에 더 머물고 싶다’고 느낀 곳이 바로 호이안이었다. 신기하게도 베트남이지만 베트남답지 않았고, 베트남답지 않지만 그래도 베트남이라는 안도감이 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마치 24시간 두드려대는 시끄러운 북소리에 지쳤다가, 우연히 들려온 바이올린 선율을 만난 것처럼 호이안은 내게 위로와 치유를 선물해준 도시였다.
어쩌면 내게 여행이란 호이안이 가지고 있는 느낌처럼 익숙함을 떠나 낯섦 속으로 떠나지만, 그 낯섦 속에서 익숙함을 찾아가는 모순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행에서 우리는 각기 다른 도시와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나는 여행지나 관광지가 아닌 공항에서 그런 경험을 찾는다. 분주함 속에 묘한 적막이 흐르는 곳, 여행하는 사람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 그래서 나는 공항에서 다른 여행자를 유심히 관찰한다.
호이안은 배낭여행자와 같은 곳이다
공항에서 마주치는 여행자는 두 부류가 있다. 깔끔하게 갖춰 입고 여행용 가방을 끄는 사람, 아니면 모자를 눌러 쓰거나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배낭을 멘 사람. 나는 여행지에서만큼은 깔끔한 차림보다 어깨에 둘러멘 배낭에 눈이 더 간다. 낡고 해진 가방끈, 잔 흠과 손때로 닳고 닳은 DSLR 카메라, 허리춤의 바짝 조인 보조가방 등.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불현듯 그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싶어진다. 낡은 배낭에 깃든 추억과 카메라에 담겼을 여행의 순간들, 그리고 허리춤에 꼬깃꼬깃 담긴 지폐 한두 장의 사연이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사람은 허름하게 입어도 아름답다. 깔끔하게 차려입고 여행용 가방을 끌며 또각 걸을 때도, 배낭을 메고 성큼성큼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비록 그 사람에게서 뽀송뽀송한 피부나 코끝을 자극하는 향수 냄새가 나지 않는다 해도, 그을린 피부와 손에 든 책 한 권의 종이 냄새가 그 사람의 여행을 빛나게 해준다. 예쁘게 꾸며놓은 정원 속의 연못이 아닌 비가 와도 젖지 않는 바다처럼 말이다.
누구나, 아무렇게나 여행해도 좋은 곳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아무리 잘 준비하고 대비한다 하더라도 어린아이가 실수하는 것처럼 항상 사건이 발생한다. 어떤 이는 여행이라는 건 준비한 만큼 보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난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준비한 만큼’ 볼 수 있겠지만, 그건 반대로 ‘준비한 것만’ 볼 수도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호이안은 누군가에게는 매력이 없는 여행지일 수 있다.
그림 같은 멋진 바다를 봐야 한다면, 24시간 북적이는 생동감 있는 도시를 느껴야 한다면, 멋지고 유명한 관광지가 있어야 한다면…. 그리고 미슐랭의 별이 있는 우아한 식당을 가야 한다면. 그런 사람은 호이안으로 여행 오면 안 된다. 화려하지 않고, 본능을 잡아끄는 치명적인 매력도 없지만 그저 집에서 굴러다니는 낡은 배낭에 후줄근한 반소매 티셔츠 몇 장 구겨 넣고 발길 닿는 데로 걸으면서 그것만으로도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 요즘 화제가 되는 말로 반드시 인생에서 남들에게 인정받는 누군가가 아닌 그냥 아무나(nobody)로 살아도 괜찮은 사람만 호이안의 진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