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 재활치료, 기자가 체험해보니]
미션 반복해 수행… 집중도 높아… 마비 환자 등 운동·인지 향상 효과
일상 속 다양한 상황도 적용 가능
◇팔 뻗어 물고기 잡고, 몇 마리 잡았는지 스스로 기억해야
의료진의 지시대로 손을 뻗어 허공에 떠 있는 '시작' 버튼을 누르고 몇 가지 설정을 하니,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주위로 형형색색의 물고기가 헤엄쳐 다녔다. 의사는 "고개를 돌리면 시작하라는 표지판이 보일텐데, 응시하고 있으면 프로그램이 시작된다"고 했다. 표지판을 1~2초간 쳐다만 봤는데, 기기가 기자의 시선을 인식한 듯했다. 저절로 게임이 시작되면서 "물고기 다섯 마리를 잡으세요"라는 미션 알림이 떴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헤엄치는 물고기를 잡았다. 스스로 몇 마리를 잡았는지 기억했다가 미션 성공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데, 물고기를 너무 열심히 잡다 보니 총 몇 마리를 잡았는지 헷갈렸다. 시작 표지판은 어느새 성공 여부를 확인하는 표지판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곳을 다시 2초 정도 바라보자 '실패'를 알리는 문구가 떴다. 의사는 "다섯 마리보다 더 많이 잡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심기일전하고, 물고기를 작살로 잡도록 설정한 뒤 치료를 다시 시작했다. 이번엔 오른손에 VR용 컨트롤러가 쥐어졌다. 물고기를 향하게 한 뒤 버튼을 누르자 작살이 날아가 물고기에 꽂혔다. 미션대로 일곱 마리를 모두 잡는 데 성공했다.
분당차병원 재활의학과 김민영 교수는 "뇌졸중 등으로 마비가 온 환자는 몸을 틀고 팔을 뻗어 물고기를 잡는 단순한 동작도 어렵게 느낀다"며 "이런 훈련을 반복적으로 하면 팔을 뻗거나 손을 쥐었다 펴는 식의 운동 기능이 점차 향상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운동 기능뿐 아니라, 스스로 물고기를 몇 마리 잡았는지를 세고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인지 기능도 올라간다"며 "게임을 하는 것처럼 재미있어서 환자들의 집중도도 높다"고 말했다. 김 교수가 총 195명의 마비 환자를 대상으로 한 35개의 연구를 메타분석했더니, VR 재활치료 후 손의 운동 기능이 향상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VR을 활용한 치료는 치료 시간이 10분을 넘기지 않는 게 좋다. VR에 과몰입되거나 어지럼증 같은 부작용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재활치료에 활용할 길 무궁무진
VR 기술은 20년 전 미국에서 참전 군인들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처음 개발됐다. 국내는 2005년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공포증을 치료하기 위해 처음 도입한 후 활발히 활용되고 있다. 재활의학과에서 VR 기술을 재활치료에 접목한 건 2~3년 전부터다. 국내 의료기관으로는 분당차병원과 가천대 길병원이 시행하고 있다. 분당차병원의 VR 프로그램이 바닷속을 배경으로 해 재미와 환상을 심어준다면 길병원은 일상생활공간을 배경으로 했다. 가천대 길병원 재활의학과 이주강 교수는 "마비 환자 재활 시 VR을 활용하면 치료실에서는 할 수 없는 횡단보도 건너기, 마트에서 장보기 같은 일상생활 훈련을 다양하게 시행할 수 있다"며 "아직은 시작 단계이지만, VR을 활용한 재활치료가 무궁무진하게 발전할 것이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가천대 길병원에서는 환자나 편측무시(시력엔 이상이 없는데 뇌가 손상돼 한쪽 시야의 사물을 못 보는 것) 환자가 잘 볼 수 있도록 하는 재활치료에 VR을 접목해 시행하고 있다. 마비 환자가 걷기 훈련을 할 때 숲 속 산책길을 걷는 것처럼 만들어주는 VR 재활치료도 있다. 풍경을 감상하면서 걷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고 심리적인 안정감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이주강 교수는 "환자들의 치료 순응도가 높아 치료 효과도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정신건강의학과·재활의학과뿐 아니라 치매 환자의 일상생활을 돕는 인지행동치료에도 VR이 쓰일 것"이라며 "심지어 집에서 환자 스스로 이런 훈련을 어렵지 않게 시행할 날이 곧 올 것이라 예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