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와인 랩소디
특히 행사장 중앙에 위치한 디저트 와인 코너를 찾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그중 왼손에 레드와인잔을, 오른손에 종이컵을 든 관람객 한 명이 엉거주춤 서있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레드와 디저트 와인이 섞이는 것이 싫은 모양인지 시음주를 달라며 종이컵을 들이댔다. 그러나 샤토 직원은 디저트 와인을 따라주지 않았다. 당황한 그가 종이컵을 더 가까이 가져갔지만 여전히 고개만 가로저었다. 난감한 표정을 짓기는 시음주를 달라는 사람이나, 따라주지 못하는 사람이나 둘 다 마찬가지였다. 푸른 눈의 샤토 여직원은 왜 그리 매몰차게 ‘와인 따르기’를 거부했을까.
그 답은 간단하다. 자부심 강한 프랑스 보르도 와인이 부당하게 대우받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 와인을 결코 종이컵에 따를 수 없다’는 의미다. 콧대 높은 프랑스 와인의 한 단면이다.
유리잔 포기하면 색 관찰 안 돼
와인을 다룬 영화 ‘사이드웨이’에서는 반전의 모습이 펼쳐진다. 실의에 빠진 주인공 마일스가 평소 애지중지 아끼던 보드도 생테밀리옹 와인, ‘슈발 블랑(Cheval Blanc, 1961년산)’을 종이컵에 따라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감독은 한 병에 500만원 정도하는 고급 와인을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와 함께 먹는 장면을 내보내 주인공의 처참한 심경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실제 와인을 종이컵에 마시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먼저 최고 즐거움 중 하나인 컬러(색)를 제대로 관찰할 수 없는 것. 카베르네 소비뇽의 짙은 루비 컬러는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반면 피노 누아의 선홍색 속에는 신선함이 가득 담겨 있으니 어찌 얇고 볼이 넓은 유리잔을 포기할 수 있을까.
또한 특유의 종이 코팅 냄새 때문에 다양한 와인 향을 제대로 잡기 어렵다. 그야말로 ‘잉크 없는 만년필’ 신세로 전락한 셈이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종이컵이 축축해져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최근 보르도 그랑 크뤼 연합이 주최하고 소펙사코리아가 주관한 ‘2017 보르도 그랑 크뤼 전문인 시음회’가 열렸다. 모두 85개 샤토가 참석해 지극 정성으로 빚은 와인의 맛과 향을 자랑했다. 그중 국내에 잘 알려진 네 종류의 와인을 소개한다.
라퐁 로쉐, 신선한 느낌 최고
이 와인에서는 먼저 신선함이 느껴진다. 한 모금 마셨는데도 라즈베리, 딸기의 풋풋한 향이 성큼 다가온다. 좀더 집중하면 은은한 장미향도 잡을 수 있다. 혀끝의 감촉은 인상적이다. 벨벳처럼 부드러운 타닌이 느껴지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그 외에도 후추와 삼나무 향까지 난다. 다음은 ‘샤토 그랑 푸이 뒤카스(Chateau Grand Puy Ducasse)’로 이어진다. 정통 보르도 와인답게 검붉은색이 매혹적이다. 아무리 와인 초보자라도 쉽고 빠르게, 세련된 카카오향을 잡을 수 있다. 이어 후추향이 나타난다. 마무리는 딸기와 말린 자두향이다. 그야말로 오색향기의 향연이다.
산도와 당도 밸런스도 아주 좋다. ‘안정감 있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특히 타닌이 입안에서 둥글게 느껴질 정도로 부드럽다. 브렌딩 비율은 카베르네 소비뇽 60%, 메를로 40%로 카베르네 쇼비뇽 비율이 다소 높은 편이다.
탈보, 부드러움·강인함 동시 표현
붉은 과일 향이 강하다. 실제 첫 모금에서 체리와 야생딸기, 자두 향을 단박에 잡을 수 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오크향이나 삼나무향도 느껴진다. 한우구이 등 붉은 육류요리와 함께 먹으면 더욱 좋다. 야심한 밤에는 소시지, 치즈를 곁들여도 무난하다. 이 와인은 현대화로 생산물량이 늘면서 한때 국내 할인 장터에서는 프랑스 현지보다 더 싼, 7만원 안팎에 거래된 적도 있다.
끝으로 보르도 소테른 지역 2등급 디저트 와인인 ‘샤토 드와지 다엔(Chateau Doisy Daene)’이 온 가족을 동원·참석했다. 얇은 석회질 모래층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나면 입안을 가득 채운 볼륨이 돋보인다. 꿀물에서 잘 익은 망고, 구운 사과, 허브 등 꽤 넓은 풍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와이너리 포도나무 평균 수령은 40~50년 정도. 전형적인 소테른 디저트 와인으로 당도가 부드럽고 산도도 적당하다. 블렌딩 비율은 세미용 86%, 소비뇽 블랑 14%. 작황에 따라 비율이 약간 달라지기도 한다. 현재 3대째 운영중인 이 샤토는 지난 90년 동안 소유주가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