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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욱 절주문화 확산을 위한 전문가 협의체’ 위원장 사진-한국건강증진개발원 제공

텔레비전에서 자장면 먹는 장면을 보고나면 며칠 후 중국집에 갈 확률이 높아진다. 내 경우는 그렇다. 이보다 더 센 것이 있다. 소주 마시는 장면이 그것이다. 나만 그런 건 아닌가보다. 국내외 다수의 연구에 따르면 미디어에서 음주장면을 많이 볼수록 더 자주 그리고 더 많이 술을 마신다. 청소년이 음주장면을 자주 접하면 음주 시작 연령이 빨라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한국 텔레비전에서 음주장면이 부쩍 늘고 있다. 미디어는 눈길을 끌어야 한다. 하지만 채널이 늘어나고 다양한 방식으로 동영상을 볼 수 있는 환경에서 어려운 일이다. 연예인 중심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주목을 받자, 비슷한 프로그램이 늘어났다. 그래서인지 점점 더 자극적 장면과 소재가 등장한다. 음주도 그 중 하나다. 아마 주목을 끄는 쉬운 방법일 것이다. 드라마에서 음주는 이미 기본 구성요소가 된 지 오래다. 일반 오락 프로그램에서는 그래도 술 마시는 모습이 일종의 금기였지만 이제는 깨어지고 있다. 술 마시는 장면과 음주에 대한 대화가 많아졌고, 음주를 기본 상황으로 설정한 토크 프로그램도 등장했다. 술 취한 듯한 출연자의 모습이 그대로 방송되기도 한다.

제작진이든 출연진이든 ‘술 권하고 폭음 조장하는 방송’을 원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선을 끌기 위한 시도들이 축적되어 그런 결과가 될 수 있다. 한국에서 술로 인한 피해는 다른 나라에 비해 큰 편이다. 음주는 개인 건강만 아니라 사고, 폭력, 성범죄 등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준다. 사회적 비용도 크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아직 음주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잘못된 음주문화와 고정관념도 적지 않다.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힘들다고 지적하는 ‘주량이 얼마냐’는 질문이 입사면접에서도 사용된다.

모두가 미디어 때문은 아니지만, 미디어도 이런 태도와 문화에 한 몫을 한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 분석에 따르면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2017년 1-6월, 청소년시청률 기준 상위 41편)의 음주장면 중 명시적으로 긍정적 묘사를 한 것만도 35.2%였다. 또한 폭음 등 문제성 음주가 전체 음주장면의 32.4%를 차지했다. 음주가 유쾌한 분위기를 만드는 유용한 매개체로 묘사되면 부정적 결과는 간과된다. 술이 갈등 해소의 좋은 수단으로 제시되면 음주로 인한 공격적 대화나 폭력의 부작용은 경시된다. 높은 주량이 남성다움의 표상이라든가 음주가 독자성이 강한 진취적 여성의 상징이라는 고정관념을 미디어가 확산시킬 수도 있다.

술은 우리 일상의 한 요소이다. 따라서 드라마에서 음주 장면이 등장하고 토크 프로그램에서 술이 주제가 될 수 있다. 단지, 미디어가 음주를 조장하거나 잘못된 음주문화를 확산하진 말아야 한다.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잘못된 음주 피해를 줄이기 위해 보건복지부와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이 구성한 전문가 협의체가 ‘미디어 음주장면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협의체에는 보건학자, 미디어학자, 방송영상제작자와 방송작가 협회, 청소년 보호 단체, 언론인, 시민활동가 등이 참여했다. 가이드라인은 지난 11월 16일 열린 ‘음주폐해예방의 달 기념식’에서 발표됐다. 미디어의 음주 장면 개선을 위한 이 시도가 청소년을 보호하고 잘못된 음주를 줄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