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와인 랩소디

호주 와인의 역사는 18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인들이 이주하면서 포도 재배가 시작된 것. 200년 넘는 세월을 거치면서 신세계 절대 강자로 성장했다. 다양한 품종 재배가 가능한 자연조건과 전통·최신 방식을 넘나드는 양조기술 덕분이다. 연 간 수출물량은 7억5000만L(총생산 량의 60%)로 세계 4위다. 그중 절반은 남호주(South Australia)에서 생산된다. 지난 5월 초, 광활한 대륙을 찾아 비행기 트랩에 올랐다. 서울이여 안녕. 호주 와인 1번지, 남호주의 주도 애들레이드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7시30분. 미세먼지라고는 단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입국절차는 첫 관문부터 까다롭다. “가방에 든 짐은 당신이 꾸렸나요, 곡물 등 식물성 성분이 들어 있으면 압수당하거나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남호주는 19세기 말 유럽 전역 포도 밭을 초토화시킨 ‘진딧물(필록셀라)’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청정지역이다. 그 결과, 프랑스 보르도 지역보다 더 오래된 포도나무 원종들이 잘 보존 돼 있다. 철저한 검역 절차를 꿋꿋이 지켜온 덕분이다.

다음날 달려간 곳은 ‘호주 와인의 최고봉’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펜폴즈 매길 에스테이트(Penfolds Magill Estate) 와이너리. 애들레이드 시내 동쪽, 승용차로 2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전설적인 와인 브랜드 ‘그랜지’ 를 생산하는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평범하면서도, 뭔가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펜폴즈 특유의 고색창 연한 와인저장고와 세련된 디자인의 현대식 건물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을 처음 안내한 곳은 수석 와인메이커 피터 가고 사무실. 각종 사진과 구형 산도측정기 등 와이너리 역사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영국 출신 의사 크리스토퍼 로슨 펜 폴드는 1844년 호주 애들레이드로 이주해 집 주변에 프랑스에서 가져온 쉬라 포도 품종의 묘목을 심었다. 펜폴드 사망 후 와이너리 경영은 아내와 사위로 이어지며 전성기를 누렸다. 그 후 여러 번 경영권이 넘어가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펜폴즈 와인이 국보로 지정되 고, 일약 스타덤에 오른 것은 몇 가지 사건 때문이다. 먼저 1962년 시드니 와인박람회에서 금메달을 딴 것. 천재 와인메이커 막스 슈베르트 작품 ‘그랜지’가 그 주인공이다. 이어 1971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와인올림픽에서 우승, 1995년 미국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의 ‘올 해의 와인’으로 선정되면서 세상의 관심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그랜지는 미국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에게서 두차례에 걸쳐 100점 만점을 받았다.

그렇다면 과연 펜폴즈 와인은 어떤 향과 맛을 지녔을까. 영광스럽게도 이번 테이스팅은 피터 가고가 직접 주관했다. ‘신비주의를 표방한다’는 그가 한국 매체 방문객을 대상으로 인터뷰에 응하고 설명에 나서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펜폴즈 와인은 크게 세 가지 스타일로 구분할 수 있어요. 포도 생산이 단일 포도밭(싱글 빈야드)에서 이루어 졌느냐 혹은 동일 지역, 아니면 여러 지역 포도를 섞어 만들었느냐에 따라 다르죠.” 오늘은 이 세 가지 영역을 넘나들며 시음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물론 이 중 가장 유명한 제품은 그랜지겠죠. 그러나 이 제품 역시 여러 스타일 중 하나일 뿐”이라며 펜폴즈 와인의 우수성을 강조한다. 가장 먼저 나온 와인은 1959년부터 출시한 ‘빈 28(Bin 28)’. 쉬라즈 100% 를 사용해 만든 와인이다. “이 와인은 아직 입안에 남아 있는 치약 냄새를 없애줍니다. 아주 부드럽고 달콤하며, 아직 어린 와인이라고 볼 수 있죠. 짜고 매운 한국 음식과 아주 잘 어울릴 것 같군요.” 그 비결은 새 오크통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실제 이 와이너리에 서는 오크통 변화를 통해 다양한 종류의 와인을 만들어낸다.
펜폴즈 최고 와인메이커 피터 가고의 설명이다. 다음은 ‘빈 389(Bin 389)’와 ‘RWT 쉬라즈’로 넘어간다. 같은 오크통을 사용해 ‘베이비 그랜지’로 더 잘 알려진 빈 389(2014 빈티지)의 주 포도 품종은 카베르네 소비뇽. 약간의 쉬라즈 를 블랜딩했다. 목감기가 심해 고전했으나 초반 특유의 딸기와 오크 향을 잡았다. “만약 보르도에서 이 와인을 만들었다면 예외 없이 메를로나 카베르네 프랑을 섞었겠죠. 우리는 쉬라즈를 사용했는데, 유럽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스타일의 와인을 더 좋아하더군요.” 바로사 단일지역 포도와 프렌치 오크 통 100% 사용 등 컬트 와인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RWT 쉬라즈’ 평가에 대해서는 서운한 감정을 내보인다. “2014년 빈티지이면 분명 어린 와인입 니다. 나 역시 오랜 숙성기간을 거친 와인을 좋아하지만 가끔 영하고 신선 한 맛이 그리울 때가 있잖아요.”

피날레 장식은 역시 그랜지다. 그것도 역사적인 2008년 빈티지. 로버트 파커와 와인 스펙테이터로부터 동시에 100점을 받은 와인이다. 다른 와인과 달리 테이스팅 때도 가장 큰 잔을 사용한다. 자타가 공인하듯 ‘왕 중 왕’이란 의미다. 가장 먼저 진한 자줏빛 컬러를 마주할 수 있다. 잔을 조금 기울이면 주변으로 석류빛이 은은하게 퍼진다. 이어 코를 잔 속 깊이 들이대자 농축된 블랙베리와 페퍼 향이 단박에 느껴진다. ‘충분히 익지 않았으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기우에 불과했다. 펜폴즈 그랜지는 호주 와인의 혁신과 열정의 상징이다. 펜폴즈의 유명한 슬로건 ‘1844 년부터 영원히(1844 to evermore)’를 외치고 와인 저장고로 발길을 돌렸다.

국제 와인전문가 자격증(WSET Level 3)을 보유하고 있다. ‘와인 왕초보 탈출하기’ 등 다수의 와인 칼럼을 썼다. 서울시교육청 등에서 와인 강의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김동식의 와인 랩소디 인터뷰
"곧 한국에서 리코킹 클리닉 행사"

펜폴즈 수석 와인메이커 피터가고
영국 뉴캐슬 출신. 6세 때 호주로 이주했다. 멜버른대학 졸업 후 화학과 수학교사를 역임하던 중 와인메이커로 변신했다. 호주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와인교육기관, 로즈워디(Roseworthy)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1989년 펜폴즈 양조팀에 합류했으며, 2002년 펜폴즈 4대 수석 와인메이커로 지정되었다.
“한국 사람들은 성격이 좀 급한 것 같아요. 순차적인 시음보다는 즉석에서 그랜지나 RWT를 찾아요.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와인은 각자의 개성이 있고, 비교 시음하는 것이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펜폴즈 수석 와인메이커 피터 가고의 설명이다. 이와 함께 “단일지역에서 생산된 포도와 100% 프렌치 오크통을 사용해야 고급 와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랜지는 100% 미국산 백색 참나무로 만든 오크통을 사용한다. RWT는 그랜지를 보호하기 위해 나왔다”고 했다. 다음은 피터 가고와의 일문일답이다.
펜폴즈의 양조철학이 궁금합니다.
양조철학 첫 번째는 ‘선택’입니다. 어느 지역에서, 얼마나 잘 익은 포도를, 언제 수확하느냐에 따라 와인의 향과 맛이 천양지차로 달라지기 때문이죠. 다음은 ‘다양성’으로 포도 품종과 와인 양조방식 등을 적절히 매치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이 세상 모든 와인이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지루하고 답답하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펜폴즈를 보르도 스타일이라고 하는데요.
이건 펜폴즈의 철학과 관련 있어요. 유럽이나 아시아권의 많은 사람들이 신세계이지만 구세계 감성을 가지고 있는 펜폴즈 와인을 좋아합니다. 이는 타닌의 구성과 균형감이 탁월하기 때문이지요. 우리 와인은 유럽식 감성의 제조과정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빈 389를 ‘베이비 그랜지’라고 부르던데요.
전년도에 그랜지를 숙성시킨 오크통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인기가 좋아 판매량이 항상 달리는 편이에요. 호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와인이고요. 그 뒤를 그랜지가 잇고 있어요. 우리 회사 직원들은 농담 삼아 ‘빈 389를 선택하는 소비자는 매우 현명하다’고 합니다. 물론 이 와인은 당장 마셔도 좋지만, 품질 변화의 위험이 없다면 30~40년 보관해도 무난합니다.
그랜지를 마시기 좋은 시기는 언제인가요?
마시는 사람의 입맛에 따라 다릅니다. 과일 향을 좋아하는 경우 출시하자마자 마시기도 해요. 그래도 좋아요. 그러나 대부분의 와인 마니아들은 두 번째 캐릭터를 느끼고 싶어합니다. 이런 경우 15~20년 기다리면 됩니다. 개인적으론 3차 발효를 선호해요. 진한 가죽 냄새 등을 느끼기 위해서는 30~40년을 기다려야 해요. 물론 반세기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지요.
한국의 와인시장 전망이 궁금합니다.
중산층이 늘어나고 있어요. 여유 비용이 증가하면 자연히 와인시장도 커집니다. 먹고 마시는 걸 좋아하는 국민성이 있어 아주 매력적인 시장이라고 봅니다. 문제는 프랑스산 등 구세계 와인을 지나치게 좋아한다는 점이에요. 와인의 생명은 다양성입니다. 펜폴즈 와인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기도 하죠.
그동안 한국 매체와는 거의 만나지 않았습니다.
이미지 관리를 위해 인터뷰를 자제하는 편입니다. 굳이 표현하면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죠.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도 일절 이용하지 않아요. 현재 한국 시장은 주니어 와인메이커가 커버하고 있어요. 조만간 한국에서 리코킹 클리닉 행사를 진행할 것입니다.
남호주의 부티크 와이너리 맥라렌 베일 몰리두커

애들레이드 시내에서 승용차로 1시간 거리, 몰리두커 와이너리에서는 이국적인 멋진 풍경을 실컷 감상하면서, 그보다 더 멋진 고급 와인을 얼마든지 마실 수 있다. 한마디로 와인 마니아의 로망을 실현할수 있는 곳이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 날에는 끝 마무리 포도 수확이 한창 진행되고 있어 멋진 장관을 구경할 수 있었다. 여간해서 맞추기 어려운 기회를 잡았다. 와이너리 이름 몰리두커(Mollydooker)는 호주 방언으로 ‘왼손잡이’를 의미한다. 실제 최고경영자 사라(Sarah)를 비롯해 이곳에서 근무하는 직원 대부분은 왼손잡이다.

2005년 창립, 12년 만에 부티크 반열 진입
2005년 창립해 2006년 브랜드를 론칭한 신생 와이너리다. 12년이라는 짧은역사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생산된 와인들이 부티크 반열에 올라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과연 성공비결이 뭘까. 그 답은 최고경영자 사라의 꿈과 열정에서 찾을 수 있다. 열정에 대한 보답일까. 이 와이너리의 최상 등급 ‘벨벳 글로브(Velvet Glove)’는 로버트 파커에게서 네 차례나 99점을 받았다. 현재 한 해 330~350케이스(1케이스 12병)가 생산되고,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으로 수출된다.
‘카니발 오브 러브(Carnival of Love)’는 와인 스펙테이터에서 매년 발표하는 전 세계 100대 와인 중 2위를 2년 연속 차지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빛깔과 맛, 향이 삼박자를 이루고 있다. 실제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넣어 굴리다보면 강한 초콜릿 맛과 함께 다양한 아로마향을 느낄 수 있다. 꿀꺽 넘기고 나서도 바닐라향과 짙은 타닌감이 오래 남는다. 쉬라즈를100% 사용했다.와인 오픈과 동시에 느껴지는 복합적이면서도 매력적인 과일의 풍미가 인상적이다. 특히 시간이 조금 지나면 약간의 스파이시와 초콜릿 아로마를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다.
프룻 웨이트 높아야 좋은 와인 탄생
한 해 몰리두커 전 세계 수출 물량은 총 5만 케이스에 달한다. 아시아에서는 수입사 CSR을 통해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공식 판매(수출 5위)되고 있다. 한편 와인메이커 사라가 강조하는 좋은 와인 만드는 기준은 프룻 웨이트(Fruit Weight)다. 즉, 혀에서 과실의 부드러운 느낌이 얼마나 길게, 어디까지 느껴지는지를 측정하는 방식이다. 그 느낌이 길수록 좋은 와인으로 구분짓고 있다. 사라는 테이스팅 겸 강의에서 이렇게 열을 올렸다. “바이올리니스트나 투 레프트 핏, 더 박서 등의 프룻 웨이트는 65~70%예요. 반면 카니발 오브 러브는 85~90%, 벨벳 글로브는 95% 이상으로 최상위급에 속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