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내로라하는 와인소믈리에 모임에서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진행했다. 주제는 ‘가장 인상 깊은 와인찾기’였다. 당일 세계 각국 와인 10여 종이 선보였다. 가격은 10만원 안팎. 그 중에는 프랑스의 도멘 드 라 로마네 콩티 세컨 블랑이나 이탈리아의 슈퍼 토스카나 등 구대륙 유명 와인이 많았다.
결과는 어땠을까. 뜻밖에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의 화이트 와인 ‘카톨로지’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강한 산미와 아카시아 향이 한데 어울려 최상의 밸런스를 이뤘다”는 것이 와인전문가들이 내린 결론이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계절이 돌아왔다. 추운 겨울, 따뜻한 남쪽 나라가 그립다. 우리나라와 계절이 정반대인 남아공 와인을 한 잔 마시고, 지그시 눈 감으면 끝없이 펼쳐진 초원의 열기가 온몸 가득 느껴진다. 와인이 주는 행복이다.
굳이 스타일을 구분 짓자면 남아공 와인은 ‘신대륙’에 해당한다. 그러나 역사는 생각보다 훨씬 길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건너온 신교도들에 의해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기술이 전수됐으며, 그 시작은 350년 전이다.
피노타주,
프랑스 생쇼-피노누아 교배종
초기 웨스턴케이프 주도인 케이프타운을 중심으로 반경 60km 이내에서 와인 마을이 형성됐다. 여름인 1월 평균기온은 20℃로, 유럽과 비슷한 온대의 지중해성 기후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도 웨스턴케이프 지역의 와인 생산량은 남아공 전체 생산량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포도 품종으로는 카베르네 소비뇽이 가장 널리 재배되고, 메를로와 시라가 뒤를 잇는다. 특히 남아공에서 자체 개발한 품종 피노타주는 프랑스 생쇼와 피노누아를 교배해 만들었다. 피노타주는 서늘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유전적 성향을 고스란히 이어 받아 다른 품종과 혼합과정을 거쳐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을 구현한다. 화이트 품종으로는 슈냉 블랑과 콜롬바, 샤르도네 등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남아공에서는 과연 어떤 와인이 생산될까. 앞에서 언급한 알헤이트의 카톨로지(Alheit, Cartology)부터 살펴보자. 와인메이커이자 알헤이트 빈야드의 오너인 크리스와 수잔이 지극 정성을 들여 만든 와인이다. 젊은 부부가 직접 밀랍을 데워 한 병, 한 병 실링했을 정도라고.
이 와인의 가장 큰 특징은 강한 산미와 향이 한데 어울려 최상의 밸런스를 이룬다는 것. 고운 잔에 반짝이는 옐로골드 컬러도 와인 마니아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첫 모금에서 살아있는 요거트 풍미와 데이지·아카시아 향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이는 MLF(와인의 부드러운 맛을 내는 2차 발효)와 효모 접촉 때문이다.
또 다른 매력은 엄청난 변화와 생명력이다. 7시간 이상 테이스팅해도 계속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풍성한 유질감을 받쳐주는 산도와 밸런스를 느낄 수 있으며, 긴 여운이 혀끝에 그대로 전해진다. 프랑스 고급 부르고뉴 와인과 비교해도 손색없다.
적정 서브 온도는 11~12℃. 꽃향기와 복합미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일반 화이트 와인보다 약간 높은 온도에서 마시는 것이 좋다. 소스 없이 이즈니 버터에 구운 대구 스테이크와 함께 마시면 고급 버터 허니 풍미와 함께 와인의 꽃향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그야말로 또 다른 감동을 받을 수 있다.
‘매너하우스’ 시가박스 아로마 특징
다음으로 니더버그의 매너하우스 카베르네 소비뇽(Nederburg, Manor House Cabernet Sauvignon)을 꼽을 수 있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닐슨 만델라가 선택한 니더버그는 남아공 유명 와인 산지인 ‘팔’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매너하우스(대저택)는 와이너리의 품질을 상징하는 역사적 건물 이름이다.
이 와인은 포도 수확기 최초로 선별된, 산도와 당도가 조화를 이루는 최고의 포도로만 만들어진다. 이와 함께 발효 상태를 잘 조절하기 위해서 뚜껑이 없는 발효조를 사용한다.
아무리 초보자라도 이 와인을 처음 입안에 머금었을 때 시가박스와 타바코, 다크초콜릿 등의 스모키한 아로마를 단박에 잡을 수 있다. 어울리는 음식으로는 그릴링(고기 아래에서 불이 올라옴)된 고기로, 스모키 향과 섞이면서 풍미를 한껏 살려준다. ‘고기를 맛있게 먹기 위해 와인을 마신다’는 마니아들의 심정을 알 수 있는대목이다. 카베르네 소비뇽 100%를 사용하며, 적정음용 온도는 10℃ 안팎이다.
이와 함께 뱅 도랑스의 퀴베 아미나 쉬라(Vins d’Orrance, Cuvee Ameena Syrah)도 남아공 대표 와인 대열에 빠질 수 없다. 포도 품종은 쉬라를 100% 사용했으며, 기본 구조는 스파이시함과 부드러운 탄닌감을 꼽을 수 있다. 집중하면 생생하며 맑고 달콤한 과일의 즐거움을 쉽게 잡을 수 있다.
웨스턴케이프주의 페더버그와 엘긴두 지역의 테루아 영향을 받아 견고한 탄닌감과 부드럽고 우아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남아공의 테루아에 프랑스 북부 론와인 스타일이 더해진 타입이라고 보면 정확하다.
페어뷰, 염소 탑 관광명소로 유명
끝으로 서머셋웨스트에 위치한 모겐스터의 로렌스 리버 밸(Morgenster, Lourens River Valley)는 짙은 루비레드 컬러와 가벼운 타바코, 검은 열대과일 향이 돋보이는 와인이다. 그 때문인지 첫 모금에서 강렬하고 달콤함이 입안 가득 전해진다. 아로마의 복합성 또한 쉽게 느낄 수 있는데, 이는 풀 바디 와인처럼 무겁지 않으면서도 적당한 탄닌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와인 가격을 결정짓는 중요 요인 중 하나인 피니시 또한 길고, 과실 향의 달콤함 또한 유혹적이다.
포도 품종 블랜딩 비율은 메를로 46%, 카베르네 프랑 32%, 카베르네소비뇽 18%, 프티 베르도 3%. 프렌치 300L 오크통에서 14개월 동안 숙성했다. 약간의 채소를 곁들인 구운 오리나 가금류 고기와 함께 마시면 더욱 좋다. 생선과 함께 먹어도 다채로운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이외에도 데일리 와인으로 가장 대중적인 디스텔의 ‘오비콰(Obikwa)’ 시리즈와 페어뷰의 ‘고트(Goat)’ 시리즈가 국내에 잘 알려져 있다. 특히 페어뷰는 염소치즈 생산으로 유명하며 와이너리 상징인 염소 탑은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고트 두 룸(Goats doRoam) 레드의 경우 시라와 생쇼, 무르베드르 등 프랑스 론 지방과 남아공 고유 품종을 섞어 마시기에 부담없는 편이다.
김동식 와인칼럼니스트.
국제 와인전문가 자격증(WSET Level 3)을 보유하고 있다. ‘와인 왕초보 탈출하기’ 등 다수의 와인 칼럼을 썼다. 서울시교육청 등에서 와인 강의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