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영화 속 이야기가 현실이 된다. 2000년 레줄린(Rezulin)이라는 당뇨병치료제가 미국 시장에서 퇴출되었을 때도 그랬다. 레줄린(Rezulin)은 1997년 1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승인된 트로글리타존(Troglitazone)이라는 약의 상품명으로, 기존 치료제와는 다른 새로운 개념의 당뇨병 치료제로 각광을 받았다.
그런데 사건이 터졌다. 이듬해 5월 이 약을 복용 중이던 환자 중 한 명이 간기능부전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마침 이 환자가 미국 국립보건원의 임상연구에 참여 중이어서 여러 의사가 부작용을 모니터링하던 차에 벌어진 사건이라 충격이 컸다. 이어진 조사에서 레줄린 복용과 관련된 간 부전이 430건 있었고, 이 약을 복용하면 간이 심각하게 손상될 위험이 무려 1200배 증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2000년 3월 미국 FDA 조치로 레줄린은 시장에서 완전히 퇴출됐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비극은 되돌릴 수 없었다. 이미 팔린 약만 해도 21억달러(2조4000억원)어치에, 복용한 사람은 190만 명이나 되었으며, 그중 63명이 결국 간부전으로 사망했다.
심각한 독성이 있는 약이 어떻게 버젓이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고 판매될 수 있었을까? 그동안 숨겨졌던 사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먼저 레줄린을 판매한 제약회사가 이 약이 갖고 있는 치명적 간 독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숨긴 사실이 밝혀졌다.
2002년 <LA타임스>는 회사 경영진이 미국 정부의 빠른 승인을 받기 위해 레줄린의 간 독성에 대한 정보 공개를 고의로 지연시킨 사실을 회사 내부문건을 찾아서 폭로했다. 또한 제약회사 관계자들이 1993년 이미 이 약으로 인해 간 손상을 입은 환자의 사례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밝혀졌다.
이후 드러난 사건의 전모는 영화보다 더 끔찍한 현실을 보여줬다. 당시 FDA 의학담당관으로 레줄린 신약심사를 맡은 존 게리기언은 이 약의 잠재적 독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제약회사 측은 약의 위험성이 과대평가되었다는 로비와 동시에 게리기언이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들은 게리기언이 관련자 미팅에서 저속한 언어를 사용한다고 딴지를 걸었다. 결국 1996년 11월 게리기언은 레줄린 심사에서 제외되었고, 관련 보고서도 전부 폐기 처분되고 말았다. 게리기언이 레줄린에 대해 남긴 부정적인 약물심사 기록은 회사 측에 이메일로 보내졌으며, FDA 심사 자문위원회에서는 기록이 삭제됐다.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결과는 참담했다. FDA 심의 사상 최단 기간인 6개월 만에 시판이 승인된 당뇨치료제, 레줄린은 공화·민주 양당 의원과 제약회사의 로비에 따라 심의기간을 최소화하고 서둘러 시판을 허용했다가 수많은 사망자를 낳은 최악의 사례가 된 것이다.
새로운 약, 부작용 가능성 더 높다
그렇다면 레줄린에 대한 우리나라 언론의 반응은 어땠을까? 1998년 한 일간지에 실린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신개념 당뇨치료제 레줄린이 각광받고 있다. 일본이 개발, 미국 파크 데이비스사가 판매하고 있는 이 당뇨치료제는 지난해 미식품의약국(FDA)의 시판허가가 내려진 이래 미국에서만 1백만여명의 당뇨환자들이 복용했다.” 같은 기사에서는 이 약이 “국내 당뇨환자에겐 아직 그림의 떡. 미국·일본·영국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승인이 내려졌음에도 우리나라에선 아직 임상시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약에 대한 미디어의 태도가 대체로 이렇다. 만성질환자들 입장에서야 당연히 효과는 크고 부작용은 더 적은 새로운 약이 나오길 기대하기 마련이고, 언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신약은 당연히 좋은 뉴스거리다. 하지만 약은 가전제품도 자동차도 아니다. 신약이 항상 더 안전하거나 신약의 치료 효과가 매번 더 뛰어나지 않을뿐더러, 안전성 면에서 축적된 자료도 더 적다. 약의 효과를 알아내는 데는 수천 명이면 충분할지 몰라도, 약의 부작용을 모두 알아내는 데는 크게 부족하다.
10만 명에 한 건 발생하는 부작용일지라도 심각한 경우라면 약을 퇴출시킬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약일수록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부작용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오랫동안 여러 사람이 사용한 약일수록 반드시 부작용이 적은 건 아니지만, 더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어서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예측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약에 관한 한 신약이 무조건 기존 약보다 낫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2012년 캐나다 요크대학교에서는 정부가 신약을 더 빠르게 승인해줄 경우, 안전성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연구를 통해 증명했다. 캐나다 보건성에서는 암, 에이즈, 다발성 근육경화증 등 중병을 치료하는 약은 우선 처리하는 것으로 해서 더 빠르게 승인해주어 표준 처리기간보다 절반 정도로 기간이 단축되는데, 이렇게 해서 시장에 더 빨리 나온 약이 나중에 부작용 문제가 생기거나 이로 인해 시장 퇴출될 확률이 3건 중 하나로 평균인 5건 중 하나에 비해 더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신문 기사에서는 레줄린이 국내 환자에게는 그림의 떡이라고 썼지만, 실은 그게 다행이었다. 국내에서 승인은커녕 임상시험조차 미적거리고 있는 동안, 해외에서 이 약이 퇴출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로 인해 대한민국에서는 레줄린으로 인해 간 독성 부작용을 경험한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레줄린을 복용한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 같지 않다. 다른 기사에서는 “한국에선 이 약의 공식 사용허가가 나지 않았으나 불법으로 유통되는 경우가 있다”는 관계자의 발언이 눈에 띈다. 해외여행 중에 또는 인터넷으로 아직 국내에 승인되지 않은 약이나 건강기능식품을 구입하는 요즘 사람들처럼 당시에도 몇몇 성격 급한 분들은 있었나 보다.
약의 효과·부작용 위험, 모두 과장 없어야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한국인 특유의 성향은 어쩔 수 없는지, 레줄린과 비슷한 계열의 로시글리타존이란 당뇨치료약이 1999년 승인받았을 때 우리나라 신문에 보도된 기사 헤드라인도 ‘부작용 없는 당뇨병치료제 선봬’였다. 하지만 부작용이 없는 약은 없다.
출시 초기에는 이 약이 부작용 없다고 보도되었지만 그건 간 독성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이후 이 약으로 인해 체액저류와 부종으로 인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며 이와 관련해서 심혈관계에 위험이 우려된다는 지적이 나왔고, 이로 인해 이 약은 잠시 시장에서 퇴출되었다. 다행히 로시글리타존은 2013년 11월 “42건의 임상분석 결과, 다른 당뇨병치료제에 비해 심장 위험성을 높이지 않는다”는 발표를 통해 명예는 회복했다. 하지만 약의 안전성이 검증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은 이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 셈이다.
신약이든 기존 약이든, 부작용 없는 약은 없다. 그래서 어떤 약을 선택할 때든 세심한 저울질이 필요하다. 약은 치료로 얻는 유익이 부작용의 위험보다 우위에 있을 때만 사용해야 한다. 약에 관한 한 헤드라인이 지나치게 화려한 뉴스는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놀라운 신약에 대한 뉴스도 알고 보면 놀랍지 않고, 치명적인 약 부작용에 대한 뉴스도 때에 따라선 과장된 위험일 때가 있다. 검증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공정한 심사를 위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때로 그 시스템이 정상작동하지 않을 수 있으니 이에 대한 감시 또한 필요하다. 신약이 좋을지 이전 약이 좋을지 최선의 결과를 위해서는 그때그때 차분히 따져보는 게 정답이다.
/정재훈
과학·역사·문화를 아우르는 다양한 관점에서 약과 음식의 이면에 숨겨진 사실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많은 약사다. 현재 대한약사회 약바로쓰기운동본부 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방송과 글을 통해 약과 음식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대중에게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정재훈의 생각하는 식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