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과
이제 인슐린 혐오(嫌惡)에서 벗어나자
고려대 의대 내분비내과 김신곤 교수
입력 2016/11/23 10:21
혐오 치료 vs 명품 치료
한 세기에 걸쳐 장수하는 명품이 있다. 블루 플루티드(덴마크 왕실 도자기), 헤스테드(스웨덴 수제침대), 페리에(프랑스 탄산수) 등이 그것이다. 당뇨병 치료제 중에도 그렇게 장수하는 약제가 있다. 1922년에 처음 개발되어 100여년 가까이 진화를 거듭해오고 있는 인슐린이다. 노벨상 수상자를 여럿 낸 치료제이기도 하다.
그런 인슐린이 유독 한국에서는 혐오의 대상이다. 혈당 조절을 위해 인슐린 치료를 권하면 당뇨 인들이 보이는 반응의 대부분은 “싫다”이다. 인슐린 주사가 무섭다고도 하고, 인슐린 치료를 받을 정도가 되었으니 끝장난 인생이라는 비관적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죽어도 못 맞겠다는 분들도 있다. 선진국에서는 당뇨인의 30-40%가 인슐린 치료를 받고 있는 반면 우리의 경우는 20%에도 미치지 못한다.
인슐린 대한 대표적 오해
당뇨인들의 인슐린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는 ‘아플 것 같다’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혈당검사보다도 아프지 않다. 인슐린 치료는 중증 환자에게만 해당한다는 오해도 있다. 사실은 처음 진단받은 당뇨인들도 인슐린 치료를 하는 경우가 있다. 이후 먹는 약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고, 일부에서는 일정 기간 당뇨병이 좋아져 투약이 필요하지 않을 때도 있다.
한 번 시작하면 평생 맞는 게 아니고 췌장 기능이 회복되면 얼마든지 중단할 수 있다. 인슐린이 저혈당과 체중 증가를 가져와서 못 맞겠다는 당뇨인들도 있다. 최근에 개발된 트레시바(인슐린 디글루덱)와 같은 종일 지속형 인슐린은 주사 한 번으로 하루 이상 혈당 조절이 가능하고 저혈당의 위험도 매우 낮추었다. 또한 주사 시간의 유연성이 있어 평소보다 몇 시간 이르거나 늦게 맞아도 문제가 없다.
인슐린에 대한 오해는 일반인들도 마찬가지로 갖고 있다. 외국에 가보면 레스토랑에서 식사 전에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고 인슐린을 꺼내 맞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스스로의 건강을 위한 치료를 한다는데 남들이 이상하게 바라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어떤가? 어려서부터 췌장 기능이 나빠져 평생토록 매일 여러 번의 인슐린을 맞아야 하는 청년 당뇨인이 있다. 이들이 학교에서, 직장에서 인슐린을 맞으려면 의례 화장실을 찾는다. 그래서 이들의 소박한 바람이 있다. 눈치보지 않고 인슐린 맞는 세상이다.
사회의 인식전환과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
국민의 인식을 바꾸는 게 쉽지 않다. 때문에 언론이 중요하다. 인슐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아니라 긍정적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방송이나 뉴스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인기있는 드라마 주인공이 인슐린 주사를 맞으면서 건강하게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 어떨까? 인슐린 오해 바로잡기 특집도 좋다.
제도적 뒷받침도 중요하다. 벨기에의 경우 당뇨인의 40%가 인슐린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 혈당 조절이 잘 안되는 데도 인슐린이 처방되지 않으면, 의사와 환자에게 페널티를 준다. 반대로 적절한 시기에 인슐린을 사용해서 혈당조절이 잘되면 인센티브를 준다. 인슐린 치료를 시작하려면 환자의 심리적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설득해야 한다. 인슐린 주사법과 용량조절도 교육해야 한다. 더 많은 시간과 수고가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의 경우 이에 대한 보상은 거의 없다.
의사가 먼저 바뀌자
인슐린 혐오 문화를 바꾸려면 의사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 인슐린을 권해도 환자가 의례 거부할 것이라 생각하는 선입견과 소극인 마인드를 버려야 한다. 환자의 건강과 행복을 위한 최적의 치료법을 고민하자. 인슐린이 그런 치료라면 한번 더 설득하고 교육하자. 필자의 <인슐린 설득 노하우>를 몇 가지 소개한다.
1. 좋은 치료제인데 인슐린만큼 저평가를 받은 게 없다. 100여년간 치료제로서의 입지를 확보해온 인슐린은 그 효능과 안전성이 확보된 저평가 우량주이다. 최근 개발된 인슐린은 더욱 그렇다.
2. 고혈당으로 지친 췌장에는 백약이 무효이다. 지친 말을 계속 달리도록 채찍질해봐야 조만간 쓰러지고 만다. 이런 때는 지친 말이 쉬도록 새 말로 갈아타야 한다. 인슐린이 새 말이다. 외부에서 인슐린을 공급하면 지친 췌장이 쉴 수 있고, 이후 췌장 기능이 회복되면 인슐린을 중단할 수 있다.
3. 인슐린은 당뇨인의 건강과 행복을 지켜주는 고마운 일꾼이다. 일꾼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정도로 혈당 조절이 잘 되면 일꾼을 내보내면 된다.
4. 인슐린은 자가혈당 검사보다 아프지 않고, 연세 드신 분들도 배워서 할 만큼 어렵지 않다. 처음 시작은 어렵게 느껴지지만 곧 별거 아닌데 괜히 주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5. 한번 더 기회를 드릴 테니 다음에도 잘 조절되지 않으면 그 때는 인슐린 치료를 시작해보자.
이렇게 저렇게 해도 안될 때의 필자 마지막 멘트는 “저를 믿고 같이 해보자”이다. 이런 믿음을 주려면 의사-환자 관계가 중요하다. 환자에게 신뢰받는 의사, 환자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당뇨병 전도사가 되려고 내가 노력하는 이유다.
당뇨병이 없는 세상이 가능할까? 언젠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세상은 당뇨병으로 차별 받지 않는 세상, 눈치보지 않고 인슐린 맞는 세상이다. 당뇨병이 있음에도 건강한 당뇨인, 아니 당뇨병으로 인해 더 행복한 당뇨인들이 많아지길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