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칼럼
‘컬트 와인’ 세계 와인시장서 돌풍
글 김동식(와인칼럼리스트)
입력 2016/11/17 10:50
와인의 본고장 프랑스에 ‘그랑 크뤼(Grand Cru)’ 레이블(라벨)이 있다면 신세계 대표주자 격인 미국에는 ‘컬트 와인(Cult Wine)’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이와 함께 국제품종과 결합한 이탈리아의 ‘슈퍼 토스카나(Super Toscana)’와 칠레를 대표하는 ‘아이콘’도 부띠크 와인으로 자존심을 지킨다.
최고급 품질의 와인을 생산하는 특급 포도원 혹은 마을을 의미하는 ‘보르도 그랑 크뤼 클라세’의 역사는 16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 즉, 1855년 프랑스 만국박람회 때 나폴레옹 3세의 지시를 받고 등급을 매긴 와인을 말한다.
당시 네고시앙(와인 상인)의 시세표를 근거로 삼았다. 보통 ‘프르미에 크뤼 클라세(PREMIERS CRUS Classe)’로 알려진 프랑스 5대 와인인 샤토 오브리옹과 샤토 라피트 로쉴드, 샤토 라투르, 샤토 마고, 샤토 무통 로쉴드는 이 세상 모든 마니아들이 ‘죽기 전에 꼭 마셔보고 싶은 와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보르도 와인 등급체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경직성’이다. 샤토 무통 로쉴드 한 종류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단한 차례도 순위 변경이나 신규 등록이 없었다. 그간 와인 메이커의 양조 기술이 발전하고 최첨단 시설이 들어서는 등 와인 양조 시장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요지부동이다.
보르도 와인 등급 160년 전 그대로…
상황이 이렇다보니 일부 전문가에게서 “보르도 와인 등급 체계는 소비자 욕구나 품질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역사와 전통은 과연 완벽한 품질을 담보할 수 있을까. ‘테루아 시대는 가고 와인메이커 시대가 개막됐다’는 것이 미국 와인메이커들 주장이다.
실제 1976년 5월 프랑스에서 열린 ‘파리의 심판’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는 세계 와인 시장의 한 중심에 서게 됐다.
1990년대 초반 소량·고품질을 앞세운 ‘컬트 와인’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일으켰다. 한마디로 실험정신 강한 미국 와인은 ‘소수 정예’를 앞세워 세계 와인 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호주나 칠레는 물론,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스페인 등 일부 유럽 국가에서도 속속 ‘컬트 와인 바람’에 가세하는 형국이다. 컬트 와인은 어떤 것이 있고, 어떤 특징이 있을까.
먼저 컬트 와인 1세대로 자타가 공인하는 ‘그레이스 패밀리 카버네 소비뇽’을 꼽을 수 있다. 1981년 첫선을 보였으며 ‘높은 품질과 넘치는 수요, 한정된 생산’이라는 컬트 와인의 3대 요소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카버네 소비뇽 100%를 사용해 만든 이 와인을 잔에 따르고 코로 가져가면 포도 특유의 블랙커런트와 자두 향을 느낄 수 있다. 이후 집중하면 카시스와 감초, 양념류 등 겹겹이 숨겨진 다양한 풍미를 잡을 수 있어 재미를 더한다.
아쉽게도 연간 생산량은 200상자에 못 미치지만 대기자는 4000명이 넘는다. 전문가들은 10년 이상 숙성한 후 마실 것을 권장한다.
고품질·한정생산 컬트 와인 핵심요소
이번엔 미국 컬트 와인의 대명사 ‘스크리밍 이글’을 살펴보자. ‘나파밸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와인메이커 하이디 바렛의 작품이다. 1992년에 첫 빈티지를 생산해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에게서 99점을 받았으며, 1997년 빈티지는 100점을 받아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포도 품종 카버네 소비뇽을 기본으로 메를로와 카베르네프랑을 블랜딩한 이 와인의 큰 특징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블랙커런트와 카시스 향이다. 그와 함께 단단한 농축미, 완벽한 밸런스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실감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연간 약 8000병을 생산해 사전 예약해도 구입하기 어려울 정도다. 국내 공식 수입업체는 ‘나라셀러’다.
하이디 바렛이 떠난 후 잠시 인기가 시들했으나 2007년 들어 슈퍼스타 와인메이커인 애니파비아와 앤디 에릭슨 부부가 명성을 되찾았다. 이 부부는 2012년 밸런타인데이에 맞춰 아시아 국가 중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소비자가 200만원을 호가하는 ‘할란’ 역시 컬트 와인 대표주자로 손색없다. 할란 이스테이트 와이너리는 1985년 설립됐지만 12년이 지난 1996년에 와서야 첫 번째 와인을 생산했다. 12년 각고의 세월 끝에 선보인 와인은 시장에 나오자 마자 호평을 받았다.
‘할란’ 매년 1만8000병 한정생산
로버트 파커는 “할란 이스테이트는 캘리포니아뿐 아니라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깊은 맛의 레드 와인 중 하나”라고 평가하고 다섯 차례나 100점 만점을 부여했다. 할란은 매년 1만 8000병의 와인을 생산한다. 최대 소비국은 일본(3600병)이며 한국에 공급되는 물량은 최대 120병에 불과하다.
품종은 카베르네 소비뇽 외 메를로와 커베르네프랑을 블랜딩 포도로 사용한다. 풀바디 와인으로, 짙고 탄탄한 근육질의 느낌이 큰 특징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오크빌 지역에서 생산된다.
이외에도 프랑스 포므롤 지역 ‘르팽(Le Pin)’과 비교되는 ‘헌드레드 에이커’, 와인스펙테이터가 꼽은 9대 컬트 와이너리 중 한 곳인 ‘달라 발레’, 나파 밸리의 전설적 포도밭아이슬 빈야드의 아로호 아이슬 빈야드 카버네 소비뇽 등이 미국 컬트 와인 최고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편 199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시네쿼넌(Sine Qua Non)’과 ‘오소메(Au Sommet)’ 등이 컬트 와인 대열에 합류하면서 시장 판도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시네쿼넌은 천재 와인메이커로 통하는 만프레드 크랑클이 만든 와이너리다.
로버트 파커에게 100점 만점을 받은 ‘The 17th Nail in my Cranium 2005’라는 라벨은 ‘내 두개골에 박힌 17번 째 못’이라는 다소 무시무시한 뜻이다. 이는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받았고, 그를 기억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2007 빈티지 ‘레이블스(Labels)’와 ’픽처스(Pictures)’의 병에는 총을 든 자신의 실루엣 레이블이 붙어 있다. 여기에는 ‘생각 없이 예쁜 것만 찾는 모든 이들에게 총을 쏴버리겠다’는 재미있는 해석이 붙어 있다.
시네쿼넌, 오소메 컬트 와인 대열 합류
반면 오소메는 앞서 등장한 전설적 와인 메이커 하이디 바렛이 주도적으로 만든 컬트 와인이다. 와이너리 오너 존 슈와츠와 의기투합해 오소메를 만들었다. 이들은 나파 밸리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땅으로 알려진 아틀라스 피크의 640m 고지대에 와이너리를 세웠다. 준비기간만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오소메의 특징은 짙푸른 블랙 농도와 입에 꽉 찬 탄닌감이다. 부드럽게 올라오는 바닐라 향과 약간 농익은 과일향이 일품이다. 오소메는 ‘최정상·최고’라는 뜻으로 연간
1050병 한정생산된다. 옥션에서만 구입할 수 있고, 20년 이상 장기보관이 가능한 와인이다.
변화의 바람이 몰아치기는 스페인 와인 시장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베가 시실리아의 ‘우니코(Unico)’가 최고 권좌를 차지했다. ‘스페인의 로마네 콩티(프랑스 최고급 와인)’로 불리는 이 와인은 오크통에서 최소 10년을 숙성시킨 뒤 내놓는 것이 특징이다. 달콤한 체리와 흙 내음의 아로마 등 맛이 독특해 세계적인 와인애호가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신세계 절대 강자, 호주 와인 중에서는 그동안 펜폴즈의 ‘그랜지(Grange)’가 독보적인 존재였다. 1950년대 빈티지부터 생산된 그랜지는 로버트 파커에게서 평점 100점을 받기도 했다. 바닐라 향의 조화와 근육질의 맛이 특징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에 다수의 마니아층이 형성되어 있다.
<용어설명>
컬트 와인(Cult Wine)
소량생산·고품질 와인을 말한다. 1980년대 초반 미국 나파 밸리 와이너리를 중심으로 등장했다. 1990년대 이후 더욱 높은 인기를 끌고 있다. 포도 품종은 대부분 카베르네 소비뇽을 사용하며, 스크리밍 이글이나 할란 이스테이트, 콜긴 등이 대표적이다.
테루아(Terroir)
프랑스어로 ‘토양’이라는 뜻이지만 와인의 맛과 향을 결정짓는 여건, 즉 토양이나 기후 등 자연 조건 외에도 와인메이커의 양조 기술을 포함한 개념이다. 동일한 지역에서, 동일한 포도품종을 사용해 와인을 만들어도 각기 다른 맛을 냄은 곧 테루아가 다르기 때문이다.
‘파리의 심판(Judgment of Paris)’
1976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포도주 테이스팅 대회를 말한다. 당시 프랑스와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이 실력을 겨뤘는데 예상과 달리 캘리포니아 와인이 완승을 거뒀다. <뉴욕 타임스>는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며, 이 대회를 소재로 한 영화 ‘와인 미라클’이 제작되기도 했다.
김동식
와인컬럼니스트. 국제 와인전문가 자격증(WSET Level3)을 보유하고 있다. ‘와인 왕초보 탈출하기’ 등 다수의 와인 칼럼을 썼다. 서울시교육청 등에서 와인 강의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