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학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온 매춘의 역사

글 김재영(강남퍼스트비뇨기과 원장)

파워 남성학

신성한 잉태와 풍요로움을 갈망한 ‘신전매춘’

자발적으로 성을 판매한 사람도 처벌하도록 한 성매매특별법 조항이 ‘합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두고 후 속 논의가 활발하다. 헌법재판소는 “건전한 성풍속과 성 도덕이라는 공익적 가치는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 등과 같은 기본권 제한의 정도에 비해 결코 작다고 볼 수 없다”며 자발적 성매매도 처벌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놨다. 하지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여성인권위는 “성매매 여성에 대한 폭력적·착취적 성격을 인정한 헌재 의 기본 입장과 모순된 판결”이라고 반발했다.

일부에서는 ‘생계형 매춘’은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는데, 매춘은 종교의식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매춘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이며, 매춘부는 가장 오래 된 직업에 해당한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18세기경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 ‘모든 여성은 일생에 한 번, 미와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 신전(神殿)에서 몸을 바 쳐야 한다’는 기록을 근거로 신전 매춘은 여성이 신에게 몸을 바침으로써 신성한 잉태나 풍요로움을 얻을 수 있다는 종교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여성들은 사제(司祭)에게 기꺼이 몸을 바쳤는데, 사 제보다 여성의 수가 많아 ‘신성한 성교’를 여행자들이 대신하게 되었다. 여행자들은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은화 (銀貨)을 건네고 성적 환대를 받았고, 은화는 제단에 바 쳐졌다.

여행자들에게서 선택받지 못한 여성들은 오랜 기간 신전에 머물러야 했는데, 신전의 수입 증대와 하루 속히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여성들의 욕구가 어우러져 성접대를 전문으로 하는 윤락녀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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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셔터스톡

오늘날과 같은 상업적인 성매매는 그리스의 정치가인 솔론에 의해 이루어졌다. 솔론은 기원전 549년 인류 역사 상 최초의 공창(公娼)은 물론 축첩(蓄妾)제도를 입법화했다. 궁전에 여성들을 모여 살게 하면서 첩이 되거나 몸을 팔도록 한 것이다.

사교계를 지배하며 여왕까지 배출한 유럽의 매춘부

상업화된 매춘은 빠르게 확산되었고,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었다. 특히 기발한 홍보전략은 광고의 역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인류 최초의 도시 우르(Ur)에는 도로에 은밀한 곳으로 인도하는 이정표가 새겨져 있었다. 돌로 된 도로 곳곳에 표시된 화살표를 따라가면 윤락가에 당도했던 것이다. 이러한 호객행위는 그리스로 전승되었는데, 윤락녀들이 특수한 신발을 신는 것이었다. 신발 밑창에 ‘저를 따라 오세요!’라는 글귀를 거꾸로 새겨 넣어 진흙길 위에 확실한 광고를 남겼던 것이다.

그리스의 윤락녀들은 여러 계급으로 나뉘었는데, 맨 밑은 노예 출신인 딕테리아드, 중간은 나체로 공연하는 무희가 대부분인 알레우트리아, 맨 위는 교양과 재치를 겸비한 사교계 여성들인 헤타이라였다. 헤타이라는 사교계를 쥐락펴락했는데, 알렉산드로스 왕의 정부였던 타이스 는 나중에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결혼해 이집트의 여왕이 되기도 했다.

로마 역시 윤락산업이 번창했는데, 로마인들은 윤락녀를 ‘여우’로 여겼다. 실제로 윤락녀들은 손님을 부를 때 여우 울음소리를 냈다고 한다. 대부분의 윤락업소는 시설이 매우 화려했고, 전문 미용사를 두고 윤락녀들의 몸치장을 전담시킬 정도였다.

윤락녀는 영업활동을 하려면 해당 관청에 등록신청을 했 는데, 관리는 예명과 나이, 희망가격을 조사했다. 등록이 되면 허가증이 나왔으며, 그 대가로 소득세를 내야 했다.

한편, 서기 19년에 간통처벌법이 제정되자 갑자기 윤락녀 등록기관이 성황을 이루었는데, 유부남 애인을 보호하기 위해 여성들이 정식 윤락녀 허가증을 신청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윤락녀의 ‘음기’를 정력제로 여긴 중국의 매춘문화

중국 역시 매춘의 역사가 무척이나 오래되었는데, 본격화된 것은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관중이 ‘세수 증대’를 위해 매춘을 장려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윤락녀의 몸속에는 귀중한 ‘음기’가 쌓여 있다고 믿었다. 이 음기가 사정할 때 빠져나가는 ‘양기’ 를 보강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윤락녀와 성교하는 것이 몸에 이롭다고 여겼다. 이에 따라 창가를 찾는 것은 삶의 활력을 얻는 일이기에 중국의 윤락업은 번성할 수 있었다.

서양에 결코 뒤지지 않는 중국의 매춘은 20세기 초 절정기를 맞는다. 당시 상하이는 전 세계의 섹스 수도(首都)로 꼽혔는데, 유곽이 3000개에 달했다. 이밖에 200여 개의 무도장에서도 출장 매춘이 이루어졌다.

1930년대에 상하이에 살았던 영국 기자는 윤락녀들이 술집의 테이블 밑에서 단골손님에게 수음을 해주는 통에 정액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것이 골칫거리였다는 증언을 남겼다. 이런 이유로 술집 주인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윤락녀들에게 종이봉투를 사용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이밖에 뒷좌석에 윤락녀가 상시 대기하는 ‘택시매매춘’도 성행했다고 하는데, 손님은 시내를 돌면서 구강성교 서비스를 받았다. 번성하던 중국의 윤락산업은 1946년 공산당 정부가 모든 유곽을 폐쇄하고, 매매춘을 사형으로 처벌하면서 쇠락했다.

신라시대 원화(源花)가 윤락여성 원조

우리나라 역사에 본격적인 윤락녀의 등장은 신라시대 원화(源花)가 원조(元祖)라고 할 수 있다. 원화는 화랑제도 이전에 만든 것으로 전국의 미소녀들을 뽑아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우두머리인 남정과 준모가 서로 시기하여 폐지되자 300여 명의 원화 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주 일대에서 술과 웃음을 팔게 되었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잦은 전쟁으로 포로가 된 여성들을 병영의 노리갯감으로 활용하면서 윤락녀도 급증했다. 이후 고려시대에 천민인 양수척(揚水尺) 중 기예가 있는 여성을 뽑아 관기로 삼으면서 고급 윤락녀라고 할 수 있는 기생의 시대가 열렸다. 양수척 출신들은 노래를 하는 가척(歌尺), 무용을 주로 하는 무척(舞尺) 등으로 점차 전문화되었다.

기녀의 수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종류와 등급이 세분화 되었는데, 전문 기생학교에서 가무교육을 받고 배출되는 상층기녀인 ‘일패(一牌)’, 남몰래 매춘한다고 해서 ‘은근짜’ 라고도 불리던 ‘이패(二牌)’, 매춘 자체만을 업으로 삼던 ‘삼패(三牌)’로 구분했다.

개화기인 1916년부터는 창기들에게 세금을 걷고 매춘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공창(公娼)제가 열리게 되었다. 공 창제는 미군정에 의해 1947년 폐지되었지만 사창가는 독 버섯처럼 번져나갔다. 그러나 1960년대 초에 윤락행위방 지법이 만들어지고, 1968년에는 국내 최대 윤락업소가 밀집된 종로3가를 초토화시켰다. 대규모 단속의 전형이 라 할 수 있는데, 당시 작전명이 ‘나비작전’이었다.

나비작전이 이루어진 계기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당시 불도저로 불린 양택식 서울시장이 종로 일대의 재개발을 위해 시찰을 나섰다가 윤락녀에게서 ‘오빠, 놀다 가!’라며 치근대는 호객행위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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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영 남성 성기능장애, 발기부전 등 남성수술 분야를 이끌고 있는 강남퍼스트비뇨기과 원장. 주요 일간지 칼럼과 방송 출연 등을 통해 건강한 성(性)에 대한 국민 인식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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