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의 힐링 라이프
효재'로 더 익숙한 한복디자이너이자 보자기 아티스트 이효재씨의 이름 뒤에는 '처럼'이라는 조사가 제법 자연스럽게 따라 붙는다. 효재처럼 살고 싶고, 효재처럼 살림하고 싶고, 효재처럼 되고 싶다는 로망이 모여 마치 하나의 수식어처럼 되어버린 말이다. 그렇듯 누군가의 로망인 효재의 일상에서 힐링 코드 찾기.
"어머, 오늘 우리 집 잔치해야겠네. 뜰에 드디어 녹차꽃이 폈어요. 이것 봐요. 감국도 폈고요. 우리 집 뜰에 녹차꽃이랑 감국이 피는 날은 잔치하는 날이에요."
소녀처럼 활짝 웃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하얀 솜털을 품은 녹차꽃과 아기 손톱만 한 샛노란 감국이 지천에 피어 있었다. 그는 얼른 감국 몇 송이를 따다가 일요일 오후에 집으로 찾아온 손님을 위해 찻상을 차려냈다. 진한 국화향을 맡으며 마주하니 계절 이야기를 지나칠 수가 없다.
"저는 사계절 중 가을과 겨울을 좋아해요. 특히 가을의 묵직한 화려함을 좋아하지요. 연말은 너무 바쁘게 지나가기 때문에 저는 한 해를 나누는 기준을 가을로 잡아요. 그러니까 저는 올가을부터 쉰아홉이 된 거죠. 남들은 한 살 더 먹기 싫다고 하는데, 저는 한 살 더 빨리 먹기 위해 한 계절을 일찍 시작합니다."
가을비가 내린 이날 아침 도톰한 누빔 솜옷을 '드디어' 꺼내 입었다는 그는 남들보다 계절을 조금 서둘러 시작하는 것으로 다가올 계절에 대한 분주함을 덜어낸다고 말했다. 쉰아홉 효재에게 나이란 어떤 의미일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 때마다 그만큼 세상살이가 편해지는 것 같아요. 나이를 먹으며 주름이 진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아요. 노인이 되었는데 주름 하나 없이 스무 살 얼굴로 죽는다면 그것도 얼마나 끔찍하겠어요. 다만 얼마 전까지 내 첫 번째 소원은 통일이었는데 그보다 더 간절한 소원이 생겨버렸어요."
심각해 보이는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니 그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첫 번째 소원은 바로 '탈모를 막는 것'이란다. "주름은 괜찮은데 탈모는 슬프다"며 요즘 탈모 예방에 좋다는 하수오를 일부러 챙겨 먹고 있다고 귀띔했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 정문 앞 3층짜리 주택의 1층은 한복집 '효재'의 쇼룸 겸 매장으로, 2~3층은 자택과 작업실로 쓰고 있다. 그중 거실과 나란히 있는 50평 정도의 뜰은 그에게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려주는 소식통 같은 곳이자 수시로 휴식을 하고 마음을 달래는 힐링 공간이며, 때로는 무한한 영감을 주는 곳이다. 뜰에 무심하게 떨어진 단풍잎 한 장, 발에 채는 돌멩이 하나가 어느 날 그의 손을 거쳐 '엣지 있게' 변신해 손님을 감동시킨다.
"사시사철 손이 퍽 많이 간다"는 뜰 한쪽에는 직접 담근 장이 조용히 익어가는 장독대가 있고, 그의 고해성사와 기도를 들어주는 성모마리아상이 있다. 그는 봄에 그가 좋아하는 진달래가 피면 이곳 뜰에서 진달래 꽃잎으로 화전을 부쳐 정다운 사람들과 어울려 잔치를 하고, 이따금 꽃의 가지치기를 하거나 살랑살랑 그네에 앉아 햇볕을 쪼이며 무념무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다 뜰이 좁다고 생각되는 날에는 어스름 해질녘 집 앞 길상사를 한 바퀴 돌기도 한다. 그는 사람들이 빠져나간, 호젓하다 못해 적막한 절을 걸으며 사색하는 것을 특히 좋아하는데, 이마저도 부족하다 싶으면 내친 김에 자신만을 위한 소풍가방을 들고 집 근처에 있는 한양도성길(서울 성곽길)에 오른다.
"스트레스가 조금 심해지거나 뭔가를 해야 하는데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을 때, 큰 일을 하나 끝냈을 때는 소풍 가방 하나 들고 나를 위한 소풍을 떠나요. 어떤 날에는 아무도 없는 밤에 혼자 성곽길에 오르기도 하지요."
"밤에 혼자 다니면 무섭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말 거는 사람이나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 편하고 경관 조명이 들어오면 더욱 운치 있다"고 답한다. 누빔 재질의 면 소풍가방에는 생수병 대신 손수 수놓은 깔개와 찻잔, 보온병 그리고 미니어처 술 1병을 담아 간다. 예쁜 깔개, 예쁜 찻잔, 예쁜 보온병을 만지작거리며 그는 말한다.
"나를 치유하는 것은 '아름다움'이에요. 혼자라고 대충 먹고, 대충 차리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것들로 근사하게 차려서 나를 대접합니다."
그는 말 나온 김에 자신의 힐링 코스인 한양도성길로 소풍을 떠나자고 했다. "아주 끝내주는 곳"이라며. 흐린 날씨가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그 길로 소풍가방을 챙겨 들고 함께 길을 나섰다.

"날씨가 또 이렇게 우리에게 추억을 만들어주네요. 이것도 아주 찐한 추억이 되겠지요? 우리가 언제 같이 이 길에서 이런 비를 맞아보겠어요. 하하."
초행이었던 기자 일행을 안심시켜주는 긍정의 한마디. 부정의 상황을 긍정으로 바꿔주는 말은 효재 특유의 화법이다. 비가 그치고 다시 성곽길에 오를 때도 그는 "같은 길을 우리는 두 번이나 함께 하고 있어, 이건 대단한 인연이야!"라는 말로 무거운 발걸음을 새털처럼 가볍게 만들어줬다.
'효재의 핫스팟'이라고 소개한 곳은 성곽길의 중턱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리니 성북동 일대가 한 눈에 펼쳐졌다. 해질녘 비온 뒤 개인 하늘은 핑크빛과 연보라빛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이곳까지 오르느라 수고가 많았다'는 듯 멋진 풍경을 선물했다.
"이 성곽 좀 보세요. 모두 600년 전에 선조들이 손으로 하나하나 쌓아올린 것이잖아요. 당시에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이곳에 올라 이 성곽들을 보고 있노라면 막 울컥하면서 내가 힘들다고 느끼던 것들이 참 하찮고 사소하게 느껴져요. 그리곤 다시금 힘을 얻어요. 또 한편으로는 '이것들을 쌓아올린 사람들은 지금 없는데, 나는 지금 살아 있구나!' 하면서 '살아 있음'을 느끼기도 하지요."
그는 성곽 위 평평한 면을 찻상 삼아 깔개를 펴고 소박한 다기를 꺼내 놓았다.
"여기에서 이렇게 차를 한 잔 마시고 있으면 모든 게 내 발 아래 있는 것 같아요. 하산 후에는 단골집인 '성북면사무소'에 들러 시사모(열빙어)구이를 먹으며 따뜻한 정종 한 잔을 해요. 날씨가 좋은 날에는 성북면사무소 대신 성북동 쉼터 정자에 앉아 정종을 마시기도 하고요."
효재식 신선놀음은 어쩐지 근사하게 느껴졌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술'과 동네 이야기로 흘렀다.
"술을 조금씩 늘려가고 있어요. 조화롭고 싶어서요. 맥주는 올해부터 입문했어요. 술도 결국 훈련이더라고요. 그렇게 훈련하다보니 요즘에는 비 오는 날이나 날씨가 쌀쌀해지면 따뜻한 정종 한 잔이 생각날 때가 있어요."

불편함을 즐기며 걷는 것이 건강 비법
최근 보자기 퍼포먼스 강연 등으로 해외에서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 지난 10월 6일에는 일본 하노이에서 열린 '한·일 수교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한복 패션쇼를 선보이며 한복디자이너, 보자기 아티스트 외에 전통문화디자이너라는 수식어까지 얻었다. 여기에 11월에 나올 책 집필에 각종 인터뷰, 한복디자인까지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법도 하다. 그럼에도 그의 발걸음은 늘 가볍고, 주름은 있을지언정 얼굴에는 늘 화색이 돈다. 그만의 건강 관리법이 있는 걸까?
"운동은 따로 하지 못해요. 그냥 '옛날 사람들'처럼 불편함 자체를 즐겨요. 운전을 못 하니 웬만한 곳은 걸어 다니는데, 그게 유일한 건강 관리법인 것 같아요."
만화와 영화를 좋아하는 그는 자택인 성북동에서 영화관인 'CGV 대학로'까지 혼자 걸어 다닌다. 최근에 본 영화는 '암살'로, "영화 대사로 나오는 옛날 표현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일곱 번이나 봤다"고 말했다. 영화를 보고 집에 오는 길에는 동네 슈퍼에 들러 '끝물(떨이)'들을 사오며 '일상의 사소한 기쁨놀이'를 한다. 얼굴을 아는 이웃을 만나면 끝물을 나누기도 한다.
"걸어 다니니 이웃과 정답게 인사할 수 있어서 좋아요. 마을버스를 타면 웬만하면 한 번쯤 얼굴을 본 사람들이에요. 예전에는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면 불편해서 피하기도 하고 의식하기도 했는데, 언젠가 사람들이 저를 보고 기뻐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오히려 먼저 인사를 건네요. 저 같은 오타쿠(otaku· 한 분야에 열중해 사회성이 다소 부족한 사람)를 좋게 봐주시는 것만도 감사할 노릇인데, 그 전에는 예민하게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마음을 긍정의 코드로 바꾸고 나서 보니 세상의 평화는 나에게서 비롯되더라고요."
잠은 쪽잠으로 해결한다. 대개는 비행기나 기차, 택시나 버스를 탈 때 그 안에서 잠을 자는데 쪽잠이라 하더라도 숙면을 취하기 때문에 잠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은 없다고. 식사도 삼시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기보다는 배고플 때마다 수시로 먹는 게 습관이 됐다. 그래서 옥수수나 떡 등 간식이 손에 들려 있을 때가 많다고.
"외출할 때는 '맛밤'과 양파즙, 유산균 제품을 가방에 꼭 챙겨 다녀요. 양식은 즐기지 않는데 어쩌다 치즈케이크 같은 것을 먹게 되는 날에는 꼭 양파즙을 마셔야 속이 개운해지는 것 같아요. 어쩔 수 없는 한국 사람인가 봐요."

그는 '오촌이도 제천살이'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시골살이가 붐이 일었을 때 '오도이촌'이라는 말이 유행했어요. 적은 규모의 밭을 가꾸며 5일은 도시에서 살고 2일은 농촌에서 생활하는 전원적인 삶을 뜻하는 말인데, 저는 요즘 반대로 5일은 농촌에서 살고 2일은 도시에서 사는 오촌이도 생활을 하는 것 같아요."
오촌이도의 삶은 몇 달 전 충북 제천 '리솜리조트' 내 소나무 숲 속에 전원주택인 '담쟁이넝쿨집'과 아트숍이면서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인 '효재네뜰' 그리고 쿠킹스튜디오인 '달집' 등 효재의 공간을 꾸미면서 시작됐다. 마른 나뭇잎으로 컵받침을 만들고, 억새 줄기를 잘라 젓가락을 만들어 멋드러진 '차림'을 만들어내는 살림예술가인 그에게 제천의 자연은 최고의 놀이터이자 감성 충전 공간이다.
"그곳에 가면 제가 좋아하는 것만 있어요. 그래서 느려지고, 자연스러워지고, 촌스러워지죠. 어쩔 때는 아예 그곳에서 살고 싶기도 해요."
그는 11월에 제천살이를 담은 책을 출간한다는 소식도 전했다. 인터뷰하는 동안 그의 전화는 끊임없이 울렸다. 조카가 득남했다는 소식에 축하로 화답했고, 어느 '형님'과는 정답게 얘기하며 저녁 약속도 잡았다. 마치 유명인사가 아닌 어느 살림꾼 아줌마의 '보통 날'인 듯 그렇게.
"힐링의 단초는 사소한 일상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편안해지고 그 편안함으로 인해 내 가족과 이웃이 편안해지고, 내 가족과 이웃의 편안함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편안해지고…. 그게 진정한 힐링 아니겠어요?"
세계적인 브랜드·디자이너와 협업하고, 세계 주요 도시에서 전시회와 보자기 퍼포먼스를 열고, 굵직한 국가 행사에 참석하며 누구보다 바쁘고 긴장감 있게 살아가는 이효재라지만 그의 힐링 코드는 참 단순하면서도 소박했다. 마치 그가 지은 한복처럼, 그가 차려낸 밥상처럼, 효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