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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맛 칼럼] 진정한 여름 별미는 냉면보다 콩국수다

글 박상현(맛칼럼니스트) | / 포토그래퍼 김지아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는 기온과 습도보다는 냉면집에 늘어선 긴 행렬에서 계절을 실감한다. 여름만 되면 방송, 신문, 잡지 등에서 무슨 연례행사 마냥 냉면집을 다루는 통에 여름날 냉면집 풍경은 해를 거듭할수록 북새통이다.

하지만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 있는 '냉면광(狂)'들은 가을 메밀이 수확되는 10월 이후를 기약하며 이때부터 하안거(夏安居)에 들어간다. 햇메밀의 순정한 향을 즐기는 냉면을 여름에 먹는 것은 메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들은 냉면이 여름 해장 음식으로 각광받는 세태 또한 마뜩찮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겨울날, 몸이 채 녹기 전에 들이켜는 차가운 육수 한 모금이 주는 짜릿함과 강렬함. 그것이 냉면 해장의 진수라 생각하는 교조주의자들에게 에어컨 바람 맞으면서 먹는 냉면은 오이냉국만큼이나 가벼운, 그저 찬 국물일 따름이다.

냉면광까지는 아니고 나름 관록 있는 냉면 애호가라 자처하는 필자 역시 이 시기의 냉면은 꺼리는 편이다. 면의 호화(糊化)를 더디게 하자면 삶은 즉시 얼음물에 박박 빨아서 물을 야무지게 털어내야 하는데, 손님이 몰릴 때는 아무래도 이 과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 육수의 염도 역시 들쭉날쭉하기 일쑤라 여름냉면은 성공보다는 실패의 경험이 더 많아서다. 더러는 기다림이 음식의 맛을 더욱 각별하게 하고, 기다림이야말로 계절음식의 진정한 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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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국수


콩국수는 콩과 한반도의 오랜 인연이 낳은 음식

그렇다고 차가운 국물에 면을 말아먹는, 뜻 그대로의 냉면을 아주 포기하고 살 수는 없다. 이열치열이랍시고 삼복더위에 허구한 날 땀 뻘뻘 흘리며 뜨거운 국물만 들이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럴 때 요긴한 음식이 바로 콩국수다.

콩은 우리 민족과 인연이 깊다. 우선 한반도 북부와 만주가 원산지다. 재배 지역이 넓고 재배 조건 역시 까다롭지 않으며 보관이 용이하다. <성호사설>을 쓴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익(1681~1763)이 '굶주림을 구제하는 데 콩만 한 것이 없다'고 할 만큼 이 땅의 서민들에게 요긴한 식재료였다.

콩국수는 단백질과 지방, 그리고 각종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하면서도 소화가 잘 되니 여름음식으로 안성맞춤이다. 여기에 찬 성질의 밀국수를 말고 더운 성질의 열무김치를 찬으로 곁들임으로써 균형까지 맞췄다. 19세기 말에 편찬된 조리서 <시의전서>에는 '콩을 물에 불린 후 살짝 데치고 갈아서 소금으로 간을 한 후에 밀국수를 말아 깻국처럼 고명을 얹어 먹는다'는 기록이 있다. 이 조리법은 오늘날 콩국수를 만드는 법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콩국수에 요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일단 농도가 짙어져 콩국이 점점 콩죽이 돼간다. 단지 농도가 짙은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콩과 함께 잣, 땅콩, 캐슈너트 등의 견과류를 넣는 것이 일반화됐다. 심지어 땅콩버터를 섞거나 식물성 크림분말이 함유된 '콩 분말'을 섞기도 한다. 혹세무민일뿐더러 콩의 입장에서 여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다. 여기에 옥수수녹말과 소다를 섞어 탄력 넘치는 면을 말고, 날이 갈수록 매운맛과 단맛이 강해지는 김치까지 곁들인다. 대중은 점점 더 자극적인 음식을 찾고 여기에 얄팍한 상술까지 가세하니, 조상님들이 수백 년에 걸쳐 애써 만들어놓은 맛의 균형을 순식간에 말아먹는 형국이다.

콩국수 한 그릇 비우면 여름날의 하루가 간다

이를 복원하는 아주 빠르고 간단한 방법이 있다. 직접 콩국수를 만들어보면 된다. 우선 형태가 둥글고 표면에 윤기가 흐르는 메주콩을 구입한다. 콩을 여러 번 깨끗하게 씻은 다음 콩 분량의 3~4배의 물을 붓고 하룻밤 불린다. 다음날 아침에 콩을 삶는데, 덜 삶으면 비리고 너무 삶으면 화독내가 난다. 속까지 익고 껍질이 쉽게 벗겨지는 정도가 적당하다. 수시로 거품을 걷어주는 수고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삶은 콩을 찬물에 식히며 양손으로 살살 비벼주면 껍질이 벗겨진다.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해야 깔끔한 결과물을 얻는다. 이를 믹서기로 갈면 콩국이 된다. 물과 소금으로 콩국의 농도와 간을 조절하고 소면이나 중면을 삶아서 말면 비로소 한 그릇의 콩국수가 완성된다.

완성된 콩국수를 먹을 때도 순서가 있다. 우선 국물을 한 모금 마셔본다. 기대했던 것만큼 고소하지 않아 처음엔 좀 갸우뚱한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두세 모금 더 마셔보면 그때 비로소 맛이 느껴진다. 그것이 진짜 콩국의 맛이다. 이미 경험한 인간의 감각은 꽤 오래 유지된다. 이제부터는 면과 함께 먹어도 심심함 속에 묻어나는 콩 본연의 고소한 맛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여기에 양념이 강한 배추김치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자각한다. 그렇게 콩국수 한 그릇을 말끔히 비우고 나면 무더운 여름날의 하루가 간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닌 반전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이 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한 그릇 사먹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럼 그때부터 소문난 콩국수집 순례를 한번 다녀보시라. 당신은 이미 진짜 콩국수 맛을 봤기 때문에 여느 전문가 못지않은 선구안을 가졌으니 소문만 무성한 맛집이 아니라 제대로 된 콩국수집 하나쯤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때쯤이면 여름 더위도 한풀 꺾여 있을 것이다.

박상현
음식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맥락을 탐구하고 추적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맛 칼럼니스트. 현재 건국대학교 아시아콘텐츠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으며, 페이스북에서 '여행자의 식탁'이라는 페이지를 통해 대중들에게 맛깔 나는 맛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일본의 맛, 규슈를 먹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