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삼식이’(하루 세 끼 모두 집에서 먹는 남편을 일컫는 속어)나 ‘영식님’(하루에 한 끼도 집에서 밥을 먹지 않는 남편을 일컫는 속어)과 같은 말이 유행하는 것이다. 이런 말이 유행처럼 떠도는 것 자체가 남편 입장에서는 야속하다.
‘평생 가족을 위해 일하다가 이제야 은퇴 후 쉬게 됐는데, 밥도 제때 안 차려 주나’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내의 처지도 이해는 간다. 남편은 은퇴라는 쉼을 얻었는데, 아내는 은퇴도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이제 쉴 만해졌는데 매끼 밥을 차리려니 곤혹스럽기만 하다.

밥상이 남편의 체면이라고?
이렇게 된 이유는 ‘밥’에 대한 남편들의 벽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남편들이 요즘에는 가사일을 많이 돕는다. 설거지와 빨래, 청소 등은 물론 쓰레기 버리는 일 등도 남편이 도맡아한다. 하지만 유독 넘지 못하는 벽이 있으니 바로 밥이다.
밥짓는 게 어려워서가 아닌 것 같다. 요즘에는 쌀에 물만 부어서 버튼만 누르면 얼마든지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 이는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밥만은 아내가 차려 줘야 가장의 체면이 선다’는 남편들의 생각 때문인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밥상은 가족의 화목을 확인하는 곳인 동시에, 가장의 권위를 확인하는 곳이기도 하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에 밥상은 가족의 서열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현장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내가 차려 주는 밥상이란 가장에 대한 최고의 예우를 표현해야 하는 시험대였을지도 모른다. 아내가 정성 들여 차려 주는 밥상에서 남편들은 자신의 점수를 확인했을 것이다.
아내들도, 남편에게 차려 주는 밥상에 남편에게 주는 자신의 점수를 암묵적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그래서 남편들은 밥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망친 시험지를 찢어 버리듯이 밥상을 엎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먹을 것이 부족한 시대도 아니고, 못 먹어서가 아니라 너무 먹어서 병이 나는 시대다. 더 이상은 밥상에서 가장의 권위를 찾지도, 남편의 점수를 매기지도 않으면 좋겠다.
가사노동 부담을 줄이면 ‘밥’이 재미가 된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가 가사노동을 전문업체에 맡기는 것이다. 세탁은 세탁소에 맡기고 식사는 도우미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한 달에 두세 번만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면 반찬 걱정이나 대청소 걱정은 크게 줄어든다.
이는 단순히 밥을 짓는 데 소요되는 물리적인 시간과 힘을 덜어 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렇게 밥과 가사노동에 대한 마음의 부담을 덜어내면 남편은 밥 짓는 것에서 권위를 찾지 않게 되고, 밥 짓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처음에는 흰밥이 아닌 다양한 맛밥에 도전해 보자.
곤드레, 콩나물, 채소 등을 넣어 아내와 남편이 함께 별식을 만들다 보면 남편도 이내 점차 밥 짓는 일에 대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편안해지면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 없이도 밥을 스스로 챙겨 먹게 될 것이다.
가사노동을 위한 부부 시간표를 짜라
나는 요즘 신혼부부에게 가사노동을 위한 부부 시간표를 짜라고 조언한다. 가사노동이란 서로 시간 나는 사람이 먼저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청결함의 기준점이 높은 여성이 손해를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은퇴 후 두 번째 신혼을 맞이하게 되는 부부에게도 똑같이 가사노동 부부 시간표를 제안한다. 이때 원칙은 일의 종류에 따라 시간표를 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청소는 남편이, 밥은 아내가’라는 식으로 일을 분담하면 두 사람이 각자 누려야 할 여유 시간을 확보할 수 없다.
먼저 외부 업체에 맡길 수 있는 일을 제외한 집안일을 추려 본 후, 일주일을 단위로 각각 3일씩 집안일을 맡는다. 요일은 자신이 편한 스케줄에 맞추면 된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외식을 하고 편안하게 쉬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면 일주일에 3일 정도는 자신만의 온전한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된다.
대신 배우자가 담당하는 3일 간의 가사노동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칭찬해 주자. 내 손이 직접 닿은 것이 아니니 마음에 안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격려해 주고 이해해 주고 칭찬하다 보면 배우자는 서로에게 ‘대접하는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세 끼 밥을 차려 줘야 하는 삼식이도, 하루 한 끼도 집에서 먹지 않아 ‘님’자가 붙은 영식님도 똑같이 밥상에 집착하는 구시대적 유물이다. 밥상은 밥상일 뿐이다. 그곳에는 권위도 누군가를 평가하는 잣대도 놓여 있어서는 안 된다.
소박한 반찬이라도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먹는 밥이야 말로 축복이 아닐까. 서로 대접하고 서로 위해 주며 함께 누리는 밥상이 진정 행복한 밥상이다.

서울대 농가정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에서 가족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20여 년간 ‘결혼과 가족’이란 주제로 강의해 왔다.
현재 ‘향기 나는 가족치료연구소’ 소장으로서 ‘부부교육 훈련’프로그램과 ‘부부대화법’ 등을 교육한다. 또 성남가정법률상담소 교육원장과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가사전문 상담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