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라이프
중년부부는 성적매력을 느낄 수 없다? 부부가 오누이처럼 살면 안됩니다
기고자: 박미령 | 월간헬스조선 10월호(190페이지)에 실린 기사임
입력 2014/10/26 16:00
박미령의 두 번째 신혼④
남편들은 살다 보면 “열아홉 처녀 때는 수줍던 그 아내가 첫 아이 낳더니만 고양이로 변했네”라는 노래가 가끔 생각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아내는 이미 고양이 단계를 지나 호랑이로 변해버린 것 같다. 나이 들어 가는 아내에게서 연애 시절 여리고 다소곳했던 모습은 도무지 찾을 수 없다. ‘과연 저 여자가 내가 연애하던 바로 그 여자 맞나? 사람이 변해도 어쩌면 저리도 변할 수 있지?’ 생각하다가도 ‘저게 바로 아줌마의 힘이지. 그 힘으로 어려운 살림살이를 해내고 드센 아들 녀석 둘을 잘 길러냈지’라고 마음속으로 수긍하면 왠지 쓸쓸함이 남는다.
반면 점점 고개 숙인 남자의 모습으로 바뀌고 있는 자신을 생각하면 우울하다. 상남자는 아니어도 나름 박력있는 남자인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무슨 문제가 생겨 아내와 다툴 일이 있어도 그냥 비굴한 웃음으로 넘어가는 때가 많다. 점점 드세고 남자 같아지는 아내와 달리, 갈등을 피하고 싶고 큰 소리 나는 게 싫어지면서 자꾸 작아지는 것 같다. 남은 세월을 이렇게 역할이 뒤바뀐 채 살아가야 하나 생각하면 답답하다. 주위의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그들도 마찬가지라고 하니, 이렇게 사는게 운명이고 순리인가 싶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 신체 변화뿐 아니라 심리 변화도 나타난다. 노년학자들은 나이 들면서 겪는 심리적 변화로 ‘시간 전망의 변화’, ‘성격 변화’, ‘성역할 지각의 변화’ 등을 꼽는다. 시간 전망의 변화란 살아온 날보다 남아 있는 날의 수를 헤아리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젊은 날에는 지나온 나이를 떠올리지만, 노년에는 남아 있는 날이 얼마나 될지를 가늠하면서 살게 된다. 남은 세월이 많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나이 든 사람들은 매사에 좀 더 신중해진다. 그래서 젊었을 때에 비해 성격이 좀 더 수동적으로 변하고 내향성도 증가된다. 이를 성역할 지각의 변화라고 말한다. 성역할 지각의 변화란 남성에게는 여성성이, 여성에게는 남성성이 젊은 시절에 비해 많이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나이가 들면서 아내는 밖으로 나돌며 남자같이 변하고 남편은 집안 살림에 참견하며 잔소리가 많아지는 등 여성적이 된다. 성역할 지각의 변화는 아마, 젊은 날 집중했던 역할에 대한 반대급부가 아닐까. 젊은 시절 아내는 자녀양육과 집안일에 집중하고, 남편은 바깥일을 하면서 경제적 부양자 역할에 치중하며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나이 든 후에는 그 반대의 역할을 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심리학자 칼 융은 남자건여자건 여성성과 남성성을 모두 똑같은 분량씩 갖고 있다고 봤다. 따라서 젊은 시절 남성성을 많이 소모한 남자 노인에게는 여성성이 많이 남아 있게 되고, 여자 노인의 경우 반대로 남성성이 많이 남아 있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래서일까. 나이 들어 처녀적 수줍은 모습을 간직하기는커녕, 얼굴이 너무 두꺼워진 나머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아줌마들도 있다. 지하철에서 자리가 나면 저 멀리에서 가방을 먼저 던지고 돌진해 자리를 차지하는 아줌마도 처녀 시절에는 수줍어하는 아가씨였다. 반면 나이 많은 아저씨들은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서양 속담을 읊조리며 용기백배하던 젊은 날의 기개는 어디로 사라지고 위축되고 나약해진 모습으로 집안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잔소리를 한다.
이런 부부의 모습을 때로는 노년기부부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인식하기도 하는데, 결코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사춘기의 반항은 자아정체감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반항이 지나치면 그것이 성장의 동력이 되는 게 아니라, 인생에 오점을 남기는 심각한 일탈로 이어지기도 한다. 노년기에 나타나는 성역할 지각의 변화도 정도가 지나치면 성장의 동력을 잃어버리는 일탈의 수준으로 나타나게 된다. 성역할 정체감은 일생을 통해 일관되게 유지되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자아 개념 중의 하나다. 성전환수술을 할 것이 아니라면 어디까지나 여자는 여자이고, 남자는 남자인데, 성역할 지각의 변화가 나타난다고 해서 남편이 아내가 되고 아내가 남편이 될수 있겠는가.
나이 들면서 부부가 각각 반대성의 특징을 나타내다가 궁극에는 남녀 역할이 뒤바뀐 오누이처럼 사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우스개처럼 “우리는 부부가 아니라 혈족이야”라고 말한다. 한술 더 떠서 “그러니까 우리가 서로 성적매력을 느끼면 그건 근친상간”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나는 그런 부부를 볼 때 안타깝기도 하고, 부부가 여성성과 남성성이 뒤바뀐 채로 살아가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다. 사춘기의 심각한 반항도 그 이전 단계까지 이어져 왔던 부모와의 갈등이 누적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젊은 시절 서로 적응하느라 힘들었던 부부가 생존방식의 한 형태로 남성성과 여성성을 반대로 나타내다 종국에는 혈족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1981년 아카데미상을 받은 마크 라이델 감독의 영화 <황금연못>에 나오는 아름다운 노부부의 모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젊은 날 짜릿하게 느껴졌던 배우자의 성적매력이 은은한 노년의 성숙한 아름다움과 신뢰로 익어 가는 과정에서 오래된 포도주 같은 향기로운 부부애가 나타난다. 성숙한 노부부의 모습으로 부부가 함께 성장하며 아름답게 늙어 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성역할 정체감을 기본적으로 유지하면서, 좀 더 양성적인 영역으로 역할을 확대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서울대 농가정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에서 가족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20여 년간 ‘결혼과 가족’이란 주제로 강의해 왔다.
현재 ‘향기나는 가족치료연구소’ 소장으로서 ‘부부교육 훈련’프로그램과 ‘부부 대화법’ 등을 교육한다. eh 성남가정법률상담소 교육원장과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가사전문 상담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