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라이프
'하빠'는 육아의 주연이 될 수 없습니다
선 편집팀
입력 2014/02/02 08:00
건강멘토 박재우 교수의 힐링에세이
하빠(할아버지 아빠)' 혹은 '하바' 열풍이 불면서 할아버지가 손주 육아의 주체로 급부상하고 있다. 얼마 전 시작한 TV 예능 프로그램 <오마이베이비>는 주연이 '하빠' 역할을 하는 남성 중견 탤런트들인데, 이들의 좌충우돌 모습은 따뜻하고 감동적이다.
이를 보다 보니 얼마 전 내원한 60대 중반 여성이 떠오른다. 환자는 나를 보자마자 한숨부터 쉬더니 "어디가 불편하시느냐"는 질문은 뒤로 한 채 얘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내용인즉 이렇다. 남편을 성공시켰고, 든든한 직장을 가진 두 자녀도 좋은 짝을 만나 잘 결혼시켰다. 부부는 고지혈증과 고혈압이 있지만 적절히 관리하면서 건강하게 살고 있다. 여기까지는 걱정 없는 편안한 삶이었다.
제 2인생에 손주는 선물일까?
그런데, 예상치 못한 뜻밖의 복병이 생겼다. 딸이 낳은 아들(손자)의 육아 문제다. 직장인 딸은 아들을 출산하고 3개월 뒤 회사에 복귀했는데, 그 때부 터 육아 문제가 시작됐다. 원래 돌보미 아주머니를 쓰기로 돼 있던 터라 생 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돌보미 아주머니에 대해 끊임없이 불안해하 고 걱정하던 딸이 엄마에게 SOS를 쳤다. 사랑하는 딸의 딱한 사정을 듣고 마음이 움직였지만 이제 겨우 시작한 자신만의 자유 시간, 꿈꿔 왔던 제2의 인생을 잠시 유보해야 한다는 생각에 망설였다. 그러나, 손자를 매일 볼 수 있는 점도 좋았고, 건강에 비교적 자신 있어 고민 끝에 주중에 손자를 돌보 고, 주말에는 데려가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극심한 피로 뒤 손자 보기가 두려워요
몇 개월은 즐거웠다. 손자가 잘 먹고 잘 노니 대견했다. 아침부터 밥 먹이 고, 씻기고, 책 읽히고, 문화센터 데려가고, 유모차 태워 산책까지 시켰다. 친환경 세제로 직접 손빨래를 하고, 이유식은 유기농 재료를 사용해 만들어 먹였다. 딸을 키우던 젊은 날로 돌아간 것 같았고, 보람도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칼같이 퇴근해서 아이를 데려가던 딸의 퇴근 시간은 점점 늦어졌 고, 어떤 날은 그대로 손자를 데리고 자야 했다. 잠을 설치고 허리와 손목이 아프고 힘들었지만, "내 손자니 책임지고 잘 키워보리라"는 의지를 다지고 또 다졌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심한 피로감을 느꼈고, 옆구리에 물집이 잡혀 병원에 가보니 대상포진이었다. 의사는 무리하지 말고 1~2주간 휴식을 취하면서 약을 복용하라고 했지만, 손자 때문에 쉬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결국 손자를 놀이방에 맡기고 잠깐씩 봐주기로 했다. 이렇게 하면 어느 정도 정리될 줄 알았다. 물론 하루 종일 아이를 데리고 있을 때보다 여유는 생겼다. 그러나 여유가 생긴 만큼 입맛이 떨어지고, 힘이 빠졌다. 감기에 자주 걸리고 식은 땀이 많이 나면서 짜증도 잦아졌다.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불 안감에 건강검진을 받아봤지만 별 이상이 없었다. 다만, 스트레스가 심한 편이고 체력이 많이 저하된 것 같으니, 휴식을 충분히 취하고 운동을 더 열 심히 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만 운동을 해도 피곤하고 운동하고 싶은 의욕도 떨어졌다. 이제는 손자 보는 일이 두렵기까지 했다. 과연 다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걱정 때문에 마음만 무거웠다.
손주가 선물이 되려면…
비단 이 여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동안은 대개 할머니가 손주를 봤지만 이제는 할아버지가 손주를 위해 운전하고, 스케줄을 짜고, 밥을 해먹이는 헬리콥터로 나서는 세상이 됐다. ‘신(新) 헬리콥터’ 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젊은 사람도 힘든 육아를 이미 체력이 떨어진 시니어가 하기에는 힘들다. 제아무리 건강하고 체력 좋고, 손주를 사랑해도 육아를 감당하기에는 이미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타협의 여지가 없어 부득이하게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주의 육아를 도울 수는 있다. 그러나, ‘육아’라는 드라마의 주연은 부모이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조연에 불과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손주 육아에서 조연임을 인정하고, 손주의 부모와 철저하게 분업하는 것이 오히려 장시간 예쁜 손주를 곁에 둘 수 있는 ‘유일하고 현명한 전략’이다.
가끔 조연이 주연보다 훌륭한 연기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주연에 따라 드라마의 성패가 좌우된다. 드라마 시청률이 떨어진다고 조연이 주연을 대신할 수는 없다. 아무리 프로그램이 재미있어도, 하빠 열풍이 할아버지를 육아의 주연으로 만드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TV에서 보여지는 할아버지와 손주의 가슴 뭉클한 교감과 따뜻함은 그저 방송일 뿐이다.
박재우 교수는…
<헬스조선시니어> 건강 멘토로 활동하고 있는 박 교수는 경희대 한의과대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강동경희대병원 한방특화센터 보양클리닉 진료과장으로 활동하면서 50대 이상 시니어의 건강주치의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