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ESSAY]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임호준 헬스조선 대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산티아고 어떤 인생의 무게에 나선 길일까
‘순례자’ 되던 날 나는 풍경의 일부로 안 들리던 소리, 못 맡던 냄새까지…
고난의 길 끝에 찾아온 평온·충만감 나에만 집중해 걷던 느낌 잊지못해

시가지로 들어서자 죽 늘어선 중세 건물들 너머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첨탑들이 보였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재로 다룬 수많은 책과 영화, 다큐멘터리대로라면 이곳쯤에서 가슴은 방망이질치고, 막대기로 질질 끌던 다리에 새 힘이 솟아야 한다. 그런데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책이나 영화에선 항상 비가 내리는데 그날따라 햇볕이 따가웠다. 최종 목적지인 성당 앞 광장에선 어울리지 않게 철인 3종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온몸이 파김치가 되어 서로 끌어안고, 울부짖고, 환호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닷새 동안 약 120㎞를 걸어왔지만 상상하던 그런 장면은 재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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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ino de Santiago, A LAVACOLLA 마을 진입로에서 <출처 : 헬스조선DB>

세계인의 버킷 리스트(죽기 전에 꼭 할 일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산티아고 순례길 800㎞의 마지막 120㎞ 구간을 헬스조선 힐링투어 참가자 60여명과 함께 걸었다. '여행 채널 보며 졸기'가 특기인 필자에게도 산티아고 순례길은 버킷 리스트 1·2위였다. 백치같이 텅 빈 머리와 튼튼한 두 다리로 걷기만 하는 그런 순간을 필자는 오랫동안 기대하고 소망해 왔다. 그 길의 끝에서 깨달음과 새로운 인생을 얻었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책에서, TV에서, 영화에서 증언해 왔던가? 그 정도는 아니라도 무엇인가 강한 자극이 그 길 끝에 있을 것 같았다.

마드리드에서 버스를 타고 메세타센트럴 고원 북서부 지역에 있는 '레온'에 도착해 순례자 여권(크리덴셜)을 발급받은 뒤, 다시 버스를 타고 11세기에 형성된 '폰페라다'란 작은 중세 도시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었다. 옛 로마 제7 제미나 군단이 주둔했던 레온의 레온 대성당은 125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과 고딕 건축물로 유명한 곳. 추적추적 내리는 차가운 5월 겨울비를 맞으며 순례자들이 성당 옆을 흑백영화처럼 걷고 있었다. 작가 서영은의 산티아고 순례기행집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에 따르면 비에 젖은 바게트 빵으로 허기를 달래며,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빈대에 온몸을 뜯기며 순례자들은 고난의 순례길을 이어간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산을 넘어 '사리아'란 마을에 도착, 드디어 우리 일행도 순례자가 되었다. 전날까지 지겹게 내리던 겨울비는 부슬비로 바뀌었고 기온도 조금 올라 있었다. 마을을 벗어나자 가장 먼저 눈이 열렸다. 야트막한 초록빛 구릉이 끝도 없이 펼쳐진, 정말 그림 같은 풍경이 나타났다. 그 고요하고 평온한 기운에 빠져 필자도 풍경의 일부가 되어 걸었다.

그랜드캐니언이나 장자제(장가계)의 절경은 필설로 묘사라도 가능하겠지만 평온함 외엔 아무것도 없는 이 풍경은 아무리 뛰어난 문장가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눈의 호사에 빠져 수시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둘째 날엔 귀가 열렸다. 전날까지 전혀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시끄러울 정도로 귀를 두드렸다. 각종 새가 지저귀는 소리, 개울물이 흘러가는 소리,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이 요란한 소리들을 전날엔 왜 듣지 못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코도 열렸다. 이름 모르는 들꽃과 나무와 바람의 여린 냄새가 축사의 강한 쇠똥 냄새를 뚫고 필자에게 찾아왔다. 고난의 순례길에서 뜻하지 않게 평온함과 충만감을 느꼈다. 내 평생에 이렇게 잠잠하고 고요한 순간이 있었을까? 그래서 "너무 행복하다"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닷새 동안의 걷기를 마친 다음 날 오전. 대성당 주변을 왔다갔다 하며 한가롭게 구경하는데 펴지지 않는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긴 막대기에 의지해 걸어오는 한 젊은 여성을 보았다. 아마도 정오에 열리는 순례자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막판 스퍼트를 올리는 중이리라. 마침 부슬비가 내려 내 상상 속의 그 장면이 완벽하게 재현되고 있었다. '스테레오 타입'에 길들여진 필자는 비로소 가슴이 찡하며 눈물이 찔끔했다. 저 나이에 어떤 인생의 무게를 느껴 순례길에 오르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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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호준 헬스조선 대표

2000년 전 야고보 사도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의 마지막 말씀을 지키기 위해 걸었던 순례길은 이제 세계 최고의 힐링 여행지로 바뀌어 있었다. 마을마다 사설 알베르게(순례자 전용 숙소), 호텔, 카페, 메송(스페인 음식점)들이 순례자들에게 바가지가 없는 '착한 가격'으로 정감 어린 서비스를 제공한다. 1~1.5유로에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와 시원한 생맥주를, 10유로 정도에 최상의 스페인 음식과 와인을 즐길 수 있다. 과거처럼 춥고 배고프고 비바람 맞는 순례를 선택할 수도 있지만, 배부르고 등 따습게 약 1500년 동안에 걸쳐 축적된 산티아고 순례길 스토리의 속살을 경험할 수도 있다.

우리 일행은 맛있는 메송과 쾌적한 호텔 서비스를 만끽하며 '매뉴얼'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순례길을 걸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치유와 위로와 안식을 얻었다. 순례객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선입견 때문에 잠깐 동안이나마 쉽게 얻은 위로와 안식이 하찮게 생각되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길에서 얻은 그 느낌과 감정들이 너무 소중했다. 언젠가는 좀 더 긴 거리를, 좀 더 스스로에게 집중해 걸어보고 싶은 욕심이 일었다. 그때는 또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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