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뉴트리션
가을 향기 담아낸 착한 농부의 유기농 밥상
기획 김민정 헬스조선 기자 | 글 모정소반
입력 2011/10/27 09:16
"하늘에다 대고 용을 그려 보라지. 약 안 치고 농사가 되나."
20년 넘는 세월 동안 유기농법을 고집해 온 정천근·정호영 부자가 주위 사람에게서 숱하게 들어온 말이다. 사먹는 도시민도 쉽게 믿기 어렵지만 타성에 젖은 농민들에게 더 이해받기 어려운 것이 유기농법이다. 애초에 굳은 마음을 먹고 시작했어도 수확 때까지 수시로 닥치는 고비를 넘어야 하는 까닭이다. 밭인지, 길인지 구분 못할 정도로 잡초에 치일 때는 제초제 한 병이 아쉽고, 잎에 구멍 숭숭 뚫리도록 벌레가 들끓거나 제대로 못 자라 비틀어지는 작물을 보면 농약이나 화학 비료를 쓰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강원도 횡성군에 있는 청일관광농원의 농부 정천근 씨는 농사를 처음 시작할 때는 남들처럼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모두 사용하는 관행농을 했다. 유기농법을 시작한 것은 1989년. 밭에 농약을 친 날이면 어김없이 눈과 목이 따갑고, 머리가 무겁거나 온몸이 쑤시는 것도 힘들었지만 산과 들에 저절로 자라는 나무며 꽃은 약 한 번 안 쓰고도 무성하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였다.
유기농법은 농약, 제초제, 화학 비료. 이 세 가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유기질 비료나 미생물제재를 사용한다. 유기질 비료 중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퇴비. 가축의 분뇨나 볏짚, 재 등을 섞어서 발효시킨 것이다. 미생물제재는 병충해를 예방하고 작물을 튼튼하게 키우기 위해 사용한다. 숯을 만들 때 나오는 목초액이나 막걸리 희석액, 채소나 과일을 발효시켜 얻는 효소 등은 사람이 먹는 보약 같은 역할을 한다.
고등어나 마늘, 양파 삶은 물은 진딧물이 질색하는 재료. 만드는 방법과 사용하는 재료들이 다양한 까닭에 유기농법을 하는 농가마다 나름의 비책이나 독특한 비법이 생겨난다. 정천근 씨 역시 유기농법 초기에는 자신만의 비법을 찾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몰래 농약 치고도 잡아떼는 파렴치한’으로 몰리게 된 것은 그 과정 중에 일어난 일. 농작물에 유기질 비료를 주는 방법은 두 가지다. 토양시비와 엽면시비. 토양시비는 말 그대로 땅에 뿌리는 것이고 엽면시비는 영양제를 물에 타서 잎에 살포해 흡수시키는 것이다.
"그 엽면시비 때문에 오해를 받았지. 엽면시비를 할 때는 오후 늦게 뿌려야 돼요. 잎에 수분이 있을 때 같이 뿌려야 흡수가 잘 되니까. 동네 사람들이 볼 때는 밤마다 몰래 농약 치는 걸로 보였을 법도 하거든. 농약 치고도 왜 안 친다고 거짓말하느냐는 소리 꽤나 들었지."
겨우내 발효시켜 두었던 퇴비를 듬뿍 주고, 때때로 유기질 비료나 웃거름을 넉넉하게 줘가며 농사를 지은 덕분에 약 안 치고는 어렵다는 유기농 고추농사를 너끈하게 지어낸 다음부터는 옥수수, 토마토, 감자, 포도, 콩, 마, 더덕, 곰취, 배추, 무 등 어떤 농작물을 심든 농사에 거칠 것이 없었다. 1994년 한국유기농업협회 고추 부문 수상, 2002년 강원 농민대상 지역특화 친환경 부문 수상, 2003년 새농민 본상 친환경 부문 수상(대통령표창) 등 상도 많이 받았다.
흙과 물만으로 키워내는 궁극의 친환경, 무투입농법
가까운 친척집 찾아가듯 수시로 들르는 농원이지만 입구에 흐르는 계곡을 만나면 우선 마음이 편안해진다. 밭농사만 짓는 46300m2(1만4천여 평)의 농원 대부분이 평지에 펼쳐진다는 것도 편안함의 이유일 것이다. 구수한 퇴비 냄새가 풍길 법도 하련만, 농원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유는 한 가지. 이제는 어떤 퇴비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3년 전부터 흙과 물만으로 농사를 짓는 무투입농법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땅에 거름을 들이붓는 것도 다 사람 욕심이라는 걸 깨달은 거지. 그마저도 농작물에는 독으로 작용하는 것 같더라고. 그 독이 어디로 가겠나. 다시 사람한테로 오는 거지. 산에 들에 저절로 나고 자라는 나무며 풀을 보니까 거름 한 방울 없이 잎도 무성하고 뿌리도 깊더라고."
무투입농법의 시작 역시 고추농사였다. 고추 모종이 남았기에 곰취 밭 중간 중간 심어 보았던 것. 원래 고추는 거름을 많이 넣고 곁가지도 쳐야 한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두었는데도 고추가 풍성하게 달리더니 병 한번 들지 않고 끝까지 온전하게 남았다. 먼저 심은 곰취가 양분을 다 빨아먹었는데도 말이다. 그 길로 모든 농사에 퇴비와 거름을 끊어버렸다. 버터 없이 밀가루, 소금, 물만으로 빵 굽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농사를 짓는 데 물과 흙뿐이라니.
"상식을 깨는 농사지. 하지만 농사는 사람이 아닌 자연이 짓는다고 생각하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거든. 모든 나무는 줄기가 뻗는 만큼 뿌리도 자란다잖아. 포도만 해도 나뭇가지를 전지해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두었더니 뿌리가 그만큼 건강하게 뻗더라고."
청일관광농원의 비닐하우스는 별세계. 머리 위로는 포도가 자라고 발밑에는 고추가 무성한데 고추가 어찌나 실하고 탐스러운 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머루가 심어진 비닐하우스에서는 곰취 농사를 동시에 짓는다. 농원 주인은 ‘네가 알아서 농법’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고. 머루 잎이 무성하면 그늘이 져서 어쩌나 싶은데 곰취는 원래 산그늘에서 잘 자라는 법이란다. 물이라도 넉넉하게 주면 좋으련만 야박하게도 일주일에 딱 한 번 관주를 통해 대줄 뿐이다. 대신 두둑은 말 그대로 두둑하게 만들어 준다. 뿌리가 충분히 뻗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다.
이렇게 재배한 작물들의 뿌리는 기존의 관행농에 비해 3~4배 깊고 풍성하게 땅에 배긴다고 한다. 요즘 청일관광농원 농사의 필수픔은 기껏해야 벌레를 잡기 위한 ‘끈끈이’ 정도. 고집스러운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는 아들 정호용 씨와 함께 더덕밭을 찾았다. 3년 전에 거름 한 번 주고 지금껏 물만 주며 길렀다는 밭이다. 더덕은 생각처럼 굵지 않고 그다지 길쭉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알싸한 그 향기라니. 이 정도 더덕이면 방망이로 제법 두드릴 만하지 싶다.
"시장에서 파는 요즘 더덕은 잘못 두드렸다가는 아예 깨져버리고 말아요. 더덕 특유의 섬유질은 없고 무처럼 퍼석퍼석하거든요. 쫄깃쫄깃 씹는 맛도 기대할 수 없고요. 여기 더덕은 실뿌리만 잘라도 하얀 진이 배어나올 정도로 야무져요."
더덕은 원래 1년 내내 캘 수 있지만 봄 더덕은 맛이 쓰다. 제철은 8월 말부터 11월까지. 땅이 얼기 전, 늦가을에 캔 더덕이라야 달고 향기롭다. 청일관광농원은 다품종 소량 생산을 고집한다. 가족이 먹을 식재료는 모두 농원에서 충당하고 싶은 주인장의 마음 때문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팔려나갈 농산물이건만, 몸이 아프거나 식이요법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이곳저곳 헤매지 않고 농원의 작물로만 밥상을 차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큰 몫을 한다.
농약, 방부제 걱정 없는 건강한 반찬
아버지는 농사를 짓고, 아들은 아버지를 돕는 중간 중간, 소비자와 직거래 통로가 되는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한다. 농원 안에 있는 식당 운영은 어머니인 오영자 씨의 몫. 음식솜씨가 좋은 어머니가 만든 막장과 다양한 장아찌류는 ‘오장금’이라는 재미있는 브랜드로 판매된다. ‘오장금 여사’의 장아찌 맛은 독특하다. 만드는 방법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깻잎장아찌는 생것을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끓는 물에 살짝 데친 다음 물기를 완전히 빼고 염장을 하는 단계를 거친다. 적당히 절여지고 삭혀진 깻잎은 깨끗한 물에 소금기를 우려낸 다음 양념을 해서 살짝 익히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예전 어머니들은 깻잎에 양념을 한 다음 가마솥 밥이 뜸들 때 양재기째 얹어 쪄냈잖아요. 그러면 질깃질깃하지도 않고 부드럽게 감기는 게 밥 한 공기는 거뜬하지요. 그 맛을 재현한 거예요. 커다란 솥에 무와 양파를 큼지막하게 썰어서 깔고 소금기 우려낸 깻잎을 얹은 다음 간장과 물, 설탕을 섞어서 달인 맛간장을 붓고 15분 정도 익혀내면 오래 두고 먹어도 맛이 변하지 않는 맛있는 깻잎장아찌를 만들 수 있어요."
곰취장아찌도 비슷한 방법으로 담그는데, 밑 준비가 좀 더 까다롭다. 땅에서 뜯는 것이라 흙이 묻어 있기 때문에 흐르는 물에 충분히 헹궈 염장하는 것. 곰취는 데치지 않고 생것을 쓰는데 처음에는 뻣뻣해도 양념간장에 살짝 익혀내면 특유의 향은 줄어들면서 부드럽게 씹히는 맛을 살릴 수 있다.
더덕장아찌 만드는 방법도 독특하다. 원래 더덕장아찌는 수분을 없앤 다음 고추장 단지에 박아서 맛과 색을 들여 만든다. 하지만 농원의 더덕장아찌는 우선 간장에 담가서 더덕 진을 빼는 과정을 거친다. 충분히 숙성되면 꺼내서 방망이로 자근자근 두들겨 편 다음 물엿을 넣고 조물조물 무치다가 저며 썬 마늘과 고추를 넣고 고추장으로 버무린다. 이렇게 만든 더덕장아찌는 짠맛이 없고 질깃질깃 씹는 맛이 유난히 좋다.
청일관광농원의 장아찌가 가진 맹점 하나. 냉장고에 보관해 두고 먹어도 조금만 방심하면 하얀 곰팡이가 생긴다. 간장국물에 잠겨 있으면 문제가 없지만 조금만 떠오르면 바로 곰팡이가 생겨버린다. 방부제를 전혀 넣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골의 상당수는 그 곰팡이 때문에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한마디로 신뢰할 수 있다는 것. 싱싱한 고춧잎을 보니 나물 생각이 간절해 얼른 훑어서 데쳐 고춧잎나물을 무쳤다. 들기름과 집간장을 섞고 다진 파와 다진 마늘, 통깨를 넣고 조물조물 버무리니 고추장 넣고 밥 비벼먹기 딱 좋은 맛. 집간장은 무, 양파 등을 넣고 오랜 시간 달여서 만든 것으로 짜지 않고 감칠맛이 나 나물 맛을 한층 깊게 해준다.
늦가을에 꼭 한 번 만들어야 할 멋스러운 음료가 있다. 신맛이 강하면서 특유의 알싸한 향기가 있는 머루 효소. 유기농으로 재배한 머루니 이왕이면 유기농 설탕을 쓸 일이다. 유기농 머루는 따로 씻지 않고, 터지지 않도록 알알이 떼어내 용기에 담고 동량의 설탕을 부어 발효시킨다. 3개월만 지나면 먹을 수 있지만 시간을 두고 오랫동안 발효시키면 맛과 향이 더 깊어진다.
3개월조차 기다릴 수 없다면 즉석 효소를 만들어도 괜찮다. 미리 만들어 둔 머루 효소가 있으면 좋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는 매실청을 넣는 것도 방법. 머루와 매실청을 3:1 비율로 섞고 매실청만큼의 꿀을 넣어서 잘 섞은 다음 상온 3~4일 두는 것이다. 한창 발효가 진행 중이지만 잘 걸러서 같은 양의 물에 타면 꿀과 매실청 덕분에 달콤한 주스처럼 즐길 수 있다. 이렇게 만드는 즉석 효소는 매실청의 영향으로 발효 속도가 아주 빨라지는데 오래 두면 술처럼 변하므로 되도록 빠른 시간 안에 먹어야 한다.
10월, 농원은 마, 더덕, 고추, 포도, 머루 등의 가을걷이가 한창이지만 한쪽에는 이제 막 속이 들어차기 시작하는 배추밭이 펼쳐진다. 김장철에 절임배추로 판매될 것들인데 전화로 미리 주문하면 구입할 수 있다. 올가을, 청일관광농원의 장아찌를 구입하게 된다면 흰곰팡이 걱정을 말끔하게 날려줄 작은 돌멩이 하나 곁들여 달라는 당부를 해도 좋다. 우직한 농부의 아내, 착한 농부의 어머니인 오장금 여사가 집 앞 계곡에서 주워 깨끗하게 씻어 말린 작은 돌멩이 하나면 장아찌를 지질러 놓고 먹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