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선 초기 감기엔 약보다 휴식이 원칙이다. 기껏해야 비타민제 복용을 권유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약부터 찾는다. 병원에 가면 항생제, 소화제, 비타민제 등 평균 4~5정씩 처방한다. “감기약 먹느라 배 부르겠다”는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다. 과히 ‘감기약 공화국’이라 할 만하다. 초기 감기 증세만 보여도 일단 약부터 처방하는 우리나라 치료 관행은 옳은 것일까? 환자 입장에선 감기약이 과연 약일까, 독일까?
기본적으로 감기약만 4~5정 처방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작년 2/4분기 감기(급성 상기도감염)에 대한 ‘의료기관별 처방 건당 약품목 수’를 조사한 결과, 동네 의원은 평균 4.68개(정), 일반 병원(4.43개)과 종합병원(4.22개)은 4개 이상의 약을 처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병원(종합전문병원)급에선 3.52개를 처방, 동네 의원보다 1개 이상 적었다. 그나마 보건복지가족부가 항생제 처방률을 공개하기로 한 발표후 6개월 사이 0.2개 정도 줄어든 수치다. 우리나라 감기 처방전엔 특히 소화제와 항생제가 필수다.
정부 조사에 따르면 동네 의원은 감기 환자 처방전 중 68.1%에 소화제를 처방했고, 항생제도 감기 환자의 54.84%에게 처방한다. 2년 전엔 이보다 상황이 더 심각했다. 2006년 정부 발표에 따르면 감기 환자 10명 중 9명에게 항생제를 처방한 의원이 전국에 1117곳이나 됐다. 그렇다면 외국에선 얼마나 많은 약을 처방할까? 감기 환자 1인에 대한 의사의 처방약 품목 수는 미국 1.61개, 일본 2.2개, 호주 1.33개, 독일 1.71개, 이탈리아 1.61개, 스페인 1.78개로 우리나라의 1/2~1/3 수준이다. 영국(2.58개)과 프랑스(3.44개)가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보다 1~2개 적다.
얼마 전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 ‘감기’편에는 한국 병원의 감기약 처방 내역을 살펴본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 병원 이안 폴 박사가 “내 딸에게는 절대 이런 약을 먹이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모습이 방영됐다. 수가 많아지면 약물 이상 반응과 상호 작용 등으로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이 커지고, 약값도 올라간다고 지적한다.
약국·제약사가 감기약 과다복용 부추겨
감기약 과다복용의 책임이 의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약국은 ‘감기약 많이 복용하기 캠페인’에 동참하고 있다. 의사 처방이 필요 없는 일반 의약품 감기약을 찾는 환자에게“약 드시는 것보다 쉬면 낫는다”는 말로 되돌려 보내는 약사는 손에 꼽을 정도다. 약국에선 대부분 종합감기약이나 각종 증상에 따른 일반 의약품 감기약을 손에 쥐어 준다. 한방·생약 감기약이라면서 과립이나 드링크로 된 감기약이나 비타민제를 추가로 권하는 약국도 많다.
서울 강남의 한약사는 “예전에는 종합감기 약을 달라는 환자가 많았지만, 요즘은 대부분 빨리 낫는 감기약을 달라고 한다. 그렇다고 의사처럼 처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한방제제, 드링크 등 약사가 줄 수 있는 약들을 준다”고 말했다. 제약사의 과잉 판촉 경쟁도 한몫을 한다.
감기약 광고는‘초기 감기엔 OOO’ 하는 식으로 감기약을 빨리 복용해야 낫는다고 부추긴다. 더욱이 안전성을 강조하면서 생약, 한방제제 등으로 부작용 없이 감기를 낫게 한다는 광고도 부지기수다. 감기약은‘불황 없이’일단 출시만 하면 기본 이상의 매출이 보장되는 시장으로 인식된다.
국내 한 제약사 영업사원은 “약국에 일단 밀어 넣으면 기본 매출이 보장되므로 감기약을 생산하지 않는 제약사는 거의 없다. 약효가 거의 비슷해 누가 더 영업을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순위가 달라질 뿐”이라고 말했다. 제약사 영업사원들은 이비인후과, 내과, 가정의학과 등 감기 환자가 많이 몰리는 동네의원을 집중 공략한다.
인천지역을 담당하는 한 제약사 영업사원은 “몇년 전만 해도 의사에게 심지어 돈(리베이트)을 주는 일이 허다했다”고 말했다. EBS <다큐프라임> ‘감기’편이 인터뷰한 하버드대 마르시아 안젤 교수는 “제약업계의 가장 큰 시장은 건강한 사람을 타깃으로 한다. 한국인들이 가벼운 감기에도 평균 5가지 약을 복용한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라고 했다.
감기약, 처방할 수밖에 없다?…의사들의 변명
‘감기는 약 먹으면 일주일, 약 안 먹으면 7일 만에 낫는다’는 말이 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의학적 진실이다. 그런데도 의사들이 감기환자에게 이토록 많은 약을 처방하는 이유는 뭘까? 의사들의 항변을 들어 보면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합병증 예방 차원이다
감기 증세가 심해지면 각종 합병증이 생기기 쉬우므로 예방치료 차원에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 단순 감기는 바이러스가 원인인데, 바이러스는 항생제로 치료되지 않기 때문에 쓰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감기로 인해 세균성 중이염, 세균성 부비동염(축농증) 같은 세균성 합병증이 발생했을 때는 항생제 치료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런 합병증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항생제가 필요하다는 것이 상당수 의사들의 주장이다.또 의사조차 증상만으로는 바이러스성 감기인지 세균성 감기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경우가 많아 어쩔 수 없이 항생제를 처방한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세균성 부비동염은 고열이 나고 누런 콧물이 나오는데, 누런콧물이라고 모두 세균성이 아니며, 거꾸로 누런 콧물이 안 나온다고 세균성이 아닌 것도 아니다. 세균성 인후염의 경우 초기엔 열과 인후통 증상만 나타나므로 단순 감기로 오인하기도 한다. 때문에 판단이 잘 서지 않는 상황에서 어쩔수 없이 항생제를 쓴다고 한다.
2. 약 처방을 안 하면 환자들이 화낸다
의사들은 병원에서 약 처방도 없이 돌려 보내면 오히려 환자들이 화를 낸다고 변명한다. 한 내과 원장은“감기환자에게 ‘잘 쉬면 낫는다’고 돌려 보냈더니 ‘아파서 병원에 왔는데 약도 안 준다’고 화를 내는 환자가 있어 그 다음부턴 약을 처방한다”고 했다. 또 다른 내과 원장은 “감기는 항생제를 써봐야 소용없다고 설명해도 무조건 주사 한 방 놓아 달라며 우기는 환자들이 꽤 많다”며 “약 처방도 않고 ‘그냥 쉬라’고 하는 의사는 동네에서 ‘능력 없는 의사’로 소문이 나 환자들의 발길이 뚝 떨어진다”고 했다.
결국 감기약 처방이 과다한 이유가 의사 때문이 아니라 환자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익명의 한 대학병원 교수는 “빨리 낫지 않는다고 조급해하며 항생제 처방을 원하는 환자가 많은데다, 의사가 원칙에 따라 치료했는데 합병증이 생기면‘왜 일찍 항생제를 쓰지 않았느냐’고 따지기 때문에 의사들이 방어적으로 약 처방을 많이 하게 된다”고 말했다.
3. 증상이 많아 약이 많아진다
병원에 올 정도의 환자는 감기가 많이 악화돼 다양한 증상을 갖고 있으므로 약 처방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이는 감기환자에게 단골로 처방하는 약을 보면 답이 나온다. 콧물감기를 완화해 주는 항히스타민제, 열을 내리게 하는 해열제, 통증을 덜어 주는 진통제, 가래를 없애 주는 진해거담제, 소화를 촉진하는 소화제 등이 대표적이다. 병원에 갈 정도의 감기환자는 열이 나고, 콧물이 흐르고, 몸이 쑤시고, 가래가 끓고, 소화가 안 되므로 이런 약을 다 먹어야 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약을 복용하면 약물끼리 충돌을 일으키거나 생각지 못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감기약, 과연 안전한가?
약국에서 판매(일반의약품)하거나 병원에서 처방(전문의약품)하는 ‘감기약’의 정체는 무엇이며, 어떤 효과가 있을까? 감기는 여러 가지 호흡기 바이러스가 원인인데, 지구상에 감기 바이러스를 죽일 수 있는 약은 없다. 우리가 흔히 먹는 감기약은 감기 치료제가 아니라 감기 때문에 생기는 기침, 고열, 통증 등의 증상을 완화시키는 약이다. 콧물을 멈추게 하는 항히스타민제, 열을 내리게 하는 해열제, 통증을 완화하는 진통제, 가래를 없애주는 진해거담제 등이 쓰인다.
때문에 감기 기운이 있다고 무턱대고 감기약부터 먹는 것은 좋지 않다. 증상을 완화시킬지는 모르지만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장 흔한 감기약 부작용은 졸음과 현기증인데 콧물 약으로 쓰이는 항히스타민 성분 때문이다. 항히스타민 성분을 복용하면 권태감, 나른함, 운동신경둔화, 입 안이 바싹바싹 마름, 주의력 산만 같은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드물긴 하지만 감기약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땐 두드러기가 돋고, 기관지와 위장 점막이 붓고, 호흡 곤란 같은 심각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감기약에 많이 사용되는 몇몇 성분은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는데 진해거담제에 들어가는 코데인과 텍스트로메드로판이 대표적인 예다. 마약류로 분류되는 코데인은 장기간 복용하면 중독 위험이 있다. 텍스트로메드로판 성분도 습관성 위험이 있는데, 이 성분을 지나치게 많이 섭취하면 눈동자가 풀리고,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고 목이 마르며, 음식물을 삼키기 힘든 증상 등이 나타난다. 또 위장 장애, 혈압상승, 고열 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한꺼번에 많은 양의 텍스트로메드로판을 섭취하면 사망할 수도 있다.
지난 2004년엔 페닐프로판올아민(PPA) 성분이 함유된 감기약이 위험성 때문에 국내에서 퇴출되는 소동이 일기도 했다. PPA 성분은 교감 신경계에 작용하는 약물로, 코 충혈 제거 효과가 크고 기관지 근육 이완작용이 있어 50여 년 전부터 대부분의 나라에서 코 감기나 진해거담을 위한 감기약으로 애용되던 성분이다. 당시 식품의약품안전청은 “PPA성분이 함유된 감기약을 복용하면 출혈성 뇌졸중 발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성분이 든 감기약을 장기 복용한 사람이나 고혈압 환자가 특히 위험하다”라고 판매 중지 이유를 밝혔다.
얼마 전엔 영·유아 감기약도 문제가 됐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2세 미만 영·유아에게 감기약(일반의약품)을 사용할 경우 반드시 의사 진료를 받게 하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감기약을 복용하지 않게 했다. 이는 미국 FDA가‘비(鼻)충혈제거제, 거담제, 항히스타민제, 기침억제제 같은 비(非)처방 감기약이 증상을 완화시킬 뿐 근본적인 원인을 치료하지는 않으며, 2세 미만 영·유아에게는 안전하거나 효과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는 자문위원회 평가를 따라 동일한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