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애인은 사소한 부탁을 자주 합니다. 만나기 전 전화로 뭘 사다 달라고 하거나, 물건을 찾아다 달라고 합니다. 처음엔 기쁜 마음에 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하고 큰일도 아니고, 소소한 일을 하다보니, 제가 무수리가 된 기분입니다. 불편해진 표정을 지으면 알아서 그만 둬야 할텐데, 제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너니까 부탁하는 거야”라네요. 거절했다가는 저만 나쁜 사람이 될 것 같아 할 수 없이 또 들어줍니다. 하지만 기분은 더욱 더러워집니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고, 그만큼 가까우니 남들에게는 못할 부탁을 한다는데, 저는 그 친구에게 그런 부탁을 잘 하지 않거든요? 저만 손해 보는 기분이 나고 동시에 그런 걸 하나하나 따져보는 제가 더 부끄럽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졸지에 속 좁은 사람이 되어 버린 P )
에릭 시걸의 러브 스토리에서 제니는 올리버에게 “사랑한다면 미안하다고 하는 게 아니야(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라고 말합니다. 정말 사랑하면 웬만한 실수는 다 눈감아줘도 된단 말일까요?
친구나 애인같이 가까운 사이에서 소소한 부탁을 하거나 실수를 해도 상대적으로 덜 미안해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습니다. 불가피한 이유가 있겠거니 이해하려 애쓰고, 다음에는 내가 또 그만큼 부탁할 일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도 갖게 됩니다. 희생을 통해 상호신뢰는 깊어지는 법이니까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걸 악용합니다. 친구 이상의 친밀한 애인 관계가 맺어지고 나면 그 관계의 수준을 인질로 삼아 최대한 자기가 원하는 것만 얻어내려 ‘너니까 부탁하지 다른 사람이면 못했을거야’라면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발행합니다. 거절하면 나쁜 사람이 되어버리는 이 ‘너니까’라는 이름의 만능카드 덕분에 관계는 수렁에 빠지게 되죠.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는 정말 P씨를 애인으로 여기고 있는 걸까요? 내가 속이 좁은 것일까, 한숨만 쉬지 말고 관계의 진정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세요. 그는 당신을 애인이란 이름의 만만한 호구로 보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P씨 앞에 ‘애인 사이’란 이름의 프리패스를 꺼내는 순간 모든 일이 무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그가 이용한다고 말하면 너무 가혹한 얘기일까요?
애인 사이는 일심동체고, ‘네 일도 결국 내 일’이라는 말은 환상일 뿐입니다. 결국 두 사람은 두 사람입니다. 그걸 인정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사실은 그럴 만한 일을 만들지 말자는 의미가 더 큽니다. 사전에 배려해 주자는 얘기지요. 그런데 이를 이기적으로 해석해서 자꾸 미안해 할만한 일을 만들고 언젠가는 갚을 것이라는 기대만 심어주는 사람은 위험합니다.
p.s. 손해를 보고 파는 게 나은, 손절매를 할 타이밍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동안 퍼준 것이 아까워서 마냥 끌려가다가는 가산을 탕진할 수 있습니다. ‘애인 사이니까 모든 게 허용되어야 해’라는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종교에서 벗어나세요. 애인관계도 현실입니다. 이제는 “싫어, 내가 왜 해? 나도 바쁘거든”이라고 말하고 “내가 그 일을 해야 할 다른 이유를 대봐”라고 물어보세요. 이렇게 각을 세우고 자기 영역을 분명히 하세요. 그래야 당신을 존중하기 시작할 겁니다. 그걸 못 견디면 떠나겠지요. 효용가치가 떨어졌다고 판단했을 테니까요. 어찌 되었건 두 길 모두 P씨의 괴로움을 해결해 줄 겁니다.
/ 건국대 의대 정신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