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하지현의 `성질 연구`] ③습관성 공수표
입력 2007/04/19 11:23
‘~하자 ~할게’ 식구들에 공수표만 날리는 남편 “그런 말은 혼잣말로 하세요”
제 남편은 이런 식입니다. 저녁에 전화해서는 “30분이면 들어가니까 맛있는 거 해놔.” 그런데 집에 들어오는 시간은 무려 2시간 후입니다. 그리고는 “급한 손님이 찾아와서….” 애들이 7시쯤 전화해서 “아빠, 언제 와”라고 물으면 “응? 9시까지 들어갈게”라고 대답은 잘 하면서 결국 자정을 넘겨야 들어옵니다. ‘미리 전화라도 하지 그랬냐’라고 물으면 “미안해서 못 했지이~”라고 흘려버립니다. “일요일에 수영장 가자”라고 말해놓고서는 막상 주말이 되면 “아, 이번 주에는 아빠가 바빠서 안 되겠다”고 펑크를 냅니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고, 특별히 미안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사소한 일이라도 자꾸 쌓이니 믿음이 무너집니다. 이 사람, 왜 이러는 걸까요?
(대구 수성구에서 L )
한껏 기대를 하게 했다가 실망만 안겨주는 사람, 참 힘듭니다. ‘이제는 기대도 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지만 그래도 같이 사는 사람인데 기대감을 칼 같이 끊어 버릴 수도 없고, 그러다 보니 매번 당하고 맙니다. ‘혹시나’가 ‘역시나’로 끝나는 것은 소개팅에만 있는 불변의 진리는 아닌가 봅니다. L씨의 남편은 매번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합니다. 공수표를 날린 뒤 진심으로 반성하고 다음 번에는 꼭 약속을 지키려 하기 보다는 새로운 약속을 하는 것으로 잘못을 보상하려고 합니다. 점차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이 돼 버리는 정치인과 한 집에 사는 꼴입니다. 왜 그러는 걸까요? ‘이번에는 잘못했지만, 다음 번에 더 크고 멋진 한 판으로 보상하면 지금까지의 허물은 다 해결될 것’이라 믿는 망상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지키지 못한 약속 때문에 겪을 상대방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한편으로는 현실을 반성하고 후회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심리도 작용합니다. 지금 잘못한 것에 대해 진심을 담아 ‘미안하다’고 고백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남의 가슴 속 고통보다는 그 말을 하는 순간 느껴야 하는, 당연한 잘못에 대한 징벌적 죄의식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발버둥칩니다. 그저 잘못을 대충 덮어 위기를 모면하려는 거지요.
무엇보다 처음의 약속은 그저 독백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주말에 놀러 가자’는 말은, 사실은 ‘주말에 가족과 놀러 가고 싶다’는 혼잣말이었던 겁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꿈과 희망을 되뇌이곤 합니다. 그런데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말 희망사항을 마치 상대방에게 약속하듯이 표현한다면 문제지요. 이런 사람들은 혼잣말과 대화를 혼동합니다. 개인적 바람을 타인과 무책임하게 나누려 하다가 ‘아니면 말고’하며 뒤돌아서는 식입니다. 그러니까 약속을 지키지 못해도 진심으로 미안해 하진 않는 거죠. 약속이라는 것 자체가 그 사람에게는 혼잣말이었으니까요.
p.s. 저라면 ‘앞으로 그런 말은 혼잣말로 하라’고 말하겠어요. ‘일찍 들어갈게’는 ‘일찍 들어가고 싶어’로 바꾸라고요. 괜히 전화해서 기대하게 하지 말고, 행여 일찍 오게 되면 그냥 조용히 들어오라고요.
/ 건국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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