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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 섹슈얼, 누가봐도 예쁜데 남녀가 무슨 상관?!

헬스조선 편집팀 | 기고자=우종민 서울백병원 정신과 교수

영화 <왕의 남자>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동성애와 예쁜 남자가 인기를 얻고 있다. 공길 역을 맡았던 ‘예쁜 남자’ 이준기는 이미 국민배우가 되었다. 팬클럽 회원수가 35만을 넘는다고 한다.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놀림받고 터부시되던 크로스 섹슈얼리티가 이젠 미(美)의 절정으로 칭송받다니. 게다가 동성애까지. 물론 정면으로 동성애를 다룬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아, 그것도 사람끼리 사랑하는 방식일 수 있겠구나’ 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짧은 기간에 예쁜 남자와 동성애는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게 되었을까? 동성애자가 늘어났기 때문인가? 아니면 미를 판단하는 유전자에 집단 변형이 일어났나?

나는 이 현상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다르다’와 ‘틀리다’를 확실히 구별하게 되었음을 느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가치관과 개성에 따라 ‘다르게’ 살아간다. 하지만 ‘다르다’고 하지 않고 ‘틀리다’고 하면 나는 옳고 남은 틀렸다는 흑백논리를 깔게 된다. 그러면 배척과 멸시, 갈등이 만연하게 된다. 글로벌 시대의 경제생활을 통해 우리는 ‘다름’을 포용하고 오히려 장려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적어도 ‘다름’의 문화적 코드를 소비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원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성애나 예쁜 남자 선호현상은 늘 있었다.  어느 사회나 동성애자가 3~5% 내외는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유전자 속에 이미 그 씨앗이 담겨있다고 봐야 한다. 세계 정신의학계에서도 1970년대 초까지는 동성애를 정신질환의 하나로 보았지만, 이젠 전혀 그렇게 보지 않는다. 동성애를 윤리적 코드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면 옳고 그름을 자꾸 따지게 된다. 성적 취향은 유전자의 차이에서 비롯된 생물학적 다향성일 뿐이다. 다만 사회 상황에 따라 시한폭탄으로 볼 수도 있고, 그저 개인의 스타일로 볼 수도 있겠다.

예쁜 남자는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여체의 신비 어쩌고 해도, 사실 더 예쁜 건 잘 빠진 남자의 몸이다. 힘과 부드러움의 절묘한 배합에서 찬탄을 금할 수 없다. 다만 동성애자로 몰릴 까봐 대놓고 말을 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젠 그런 차이를 차별하지 않을 여유가 생기고 있다.

둘째, 세대의 차이가 있다. 영화 왕의 남자에 대한 감상은 세대에 따라 크게 갈린다. 기성 세대에 비해 2,30대 젊은 세대가 더 열광한다. 놀랄 일은 아니다. 문화의 주 구매자인 젊은 층은 이미 청소년기에 동성애를 다룬 '야오이' 만화를 즐겨왔다. 일탈을 선호하는 풍조는 이미 학교에 만연해있다. 물론 그들에게도 동성애는 아직 금기이다. 하지만 상품으로 소비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현대는 양성동등의 시대이다. “남자는 이래야 해, 여자는 저래야지”라는 말이 낡은 장롱 속에도 차지할 자리가 없어진 시대이다. 취직을 할 때도 맡은 업무를 해낼 수 있는 능력을 따질 뿐이다. 일 잘 하고 돈 잘 버는 데 남자 여자가 무슨 상관인가. 그런데 왜 아름다움만 별도의 기준을 요구하는가? 예쁜 건 누가 봐도 예쁜 것이고, 애잔한 마음은 누구에게도 느낄 수 있는 것 아닌가?

관객수 800만 돌파는 큰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의 20%를 넘어가기 때문이다. 언제나 변화의 싹은 소수에서 시작한다. 그 수는 아주 더디게 늘어난다. 그러다 어느 선을 넘어서는 순간, 변화는 기정사실이 된다. 순식간에 그 수가 늘어난다. 20%를 넘어서면 나머지는 금방 이쪽으로 넘어온다. 물론 반대편 20%는 남아있다. 하지만 중간층이 적어도 더 이상 적대적일 수 없는 완충지대 노릇을 한다. 그래서 이젠 마이너리티의 딱지를 떼고 순식간에 메이저로 등장한다. 이처럼 18%와 22%는 질적으로 다른 차이가 있다.

‘다름’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 우리는 새로운 주류의 등장을 목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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