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학으로 보는 체질성 저혈압
한 때 공주병 유머 시리즈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공주병의 여섯 가지 증상〉이다.
(1)세상의 여자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왜냐고? 내가 너무 예쁘니까
(2)숲 속에 들어가면 자고 싶다. 숲 속의 잠자는 공주니까
(3)경복궁에 들어가면 안방같이 편하다. 내 집이니까.
(4)사과는 절대 먹지 않는다. 독이 있을지 모르니까
(5)키 작은 남자를 보면 나머지 여섯 명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6)아버지가 보고 싶을 땐 만원자리 지폐를 꺼내본다. 세종대왕의 딸이니까 등등.
여성 환자를 만나보면 상당히 많은 여성들이 빈혈이나 저혈압으로 고생하고 있는 걸 본다. 월경(月經)을 비롯한 여성 특유의 여러 가지 생리적 특성 때문에 남성 환자 보다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편이다.
그런데 이렇게 빈혈이나 저혈압을 가진 여성들 중에는 “공주병을 앓고 있다”는 본의 아닌 오해를 받는 경우도 많다. 당사자로서는 억울한 감도 없지 않겠지만, 조금만 피로하거나 과로를 하고 나면 몸져눕기 일쑤고 심할 때는,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던 사람이 픽하고 쓰러지기도 하여 주위 사람을 당혹스럽게 하는 경우도 많다.
다행히 영화〈로마의 휴일〉에서의 그레고리 펙처럼 자신을 아껴주는 멋진 친구나 배우자가 있다면 진짜 공주님 대접을 받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엔 남성의 보호본능을 촉발시키기 위해 연약한 척하며 연극을 일삼는다는 오해와 더불어 공주병 환자 취급 받기 딱 좋은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은 공주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니라, 반대로 공주라는 숨 막히는 일상에서 일탈하고픈 진짜 공주 앤 공주 역을 맡았다.
대개 이런 공주님들(?)의 경우는 얼굴이 핏기가 별로 없이 누렇게 떠있거나 창백한 경우가 많고, 현기증을 잘 느끼며, 가슴이 답답하거나, 숨이 잘 차며,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린다. 당연히 밥 먹는 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못하고, 먹고 나면 잘 체한다. 무릎이나 허리가 시큰거리거나 아프기도 하고, 수면실조에 시달리기도 한다.
진맥을 해보면 대개는 맥이 약하고 빨라서 허열이 있는 경우가 많고, 만성적인 변비로 크게 고생하는 경우도 많다. 매달 있는 생리도 주기나 지속기간이 불규칙하고 색깔도 검붉고 완두콩이나 심지어는 직경이 5백 원짜리 동전보다도 큰 생리혈(血塊)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환자들은 서양의학에서는 원인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 심전도 검사나 뇌전도 검사를 해봐도 별다른 이상이 없으며, 단지 혈압이 지속적으로 낮으면서 위와 같은 증상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빈혈약을 처방 받고 치료를 받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동서의학의 협진을 통해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놓고 있는 중국의 한의학계에서는 이런 환자 유형을 체질성저혈압(體質性低血壓)이라고 부른다. 유전적으로 타고난 경우도 있고 후천적인 영양부족이나, 과로 등의 원인으로 기혈이 모두 허해진 현훈류(眩暈類)의 질병이다.
이 병은 기본적으로 원기가 부족하여 신정(腎精)의 생성이 제대로 되지 않음과 동시에 간(肝)이 주관하는 기의 소통작업에도 이상(疏泄不及)이 생기면서 전반적인 기의 생성과 순환에 이상이 초래된 허손성(虛損性)질병이다.
서양의학에서 말하는 뇌빈혈과 이 체질성저혈압은 사실상 동일한 원인과 결과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가 뇌의 혈액공급이 부족하여 제반 증상이 생긴다고 보는 반면, 전자는 혈압이 낮아서 뇌 혈액공급양이 부족하여 제 증상이 생긴다고 보는 차이가 있다.
당연히 기혈을 북돋우고 정기를 보해주어야(補氣補精補血)할 뿐만 아니라, 정기와 혈을 양생(養血生精化氣)하는 치법을 사용하는데 치료효과는 좋은 편이다.
사족(蛇足)을 달자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별나게 보약을 즐겨하고 또 보약에도 무턱대고 인삼, 녹용을 넣지 않으면 처방이 성립되질 않는다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지금 말한 체질성저혈압이야말로 녹용이 그 진가를 발휘한다.
/M.D 한의학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