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담 교수의 간추린 의학의 역사 (7)
타진법은 빈의 아우엔브루거가 생각해낸 것이었지만 그의 방법은 환자의 몸통을 직접 두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현재와 같이 의사가 환자의 몸에 손가락을 대고 그 위를 다른 손의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방법을 고안한 것은 프랑스의 콜비 사르였습니다. 청진기를 발명한 라엔넥을 비롯한 많은 제자를 길러내어 프랑스 의학계의 스승으로 존경받았던 그는 19세기 초 프랑스가 세계 최고의 의료선 진국으로 군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 황제에게도 전문가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고 직언을 하는 용기 있는 주치의였을 뿐 아니라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에는 스스로 은퇴하여 일체의 공직을 맡지 않은 의리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근대 서양의학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19세기 초의 파리 의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의사는 장 니콜라 콜비사르였다.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난 콜비사르는 법관이 되라는 집안의 권유를 뿌리치고 파리에서 제일 큰 병원이었던 오텔 듀에서 의학 수업을 받았고 1782년에 의사 자격을 얻었다. 그는 1788년 샤리테 병원 근무를 시작으로, 혁명 후에는 에꼴 드 상떼 의학교 병원 제1내과의 과장으로 취임하여 프랑스의 의학 발전을 주도하게 된다.
빈 학파의 영향을 받은 그는 1808년에 원래 95페이지 분량이던 아우엔부르거의「잠재성 흉강질환의 새로운 진단법」을 번역하고 보충한 440페이지의 저술을 출판하여 타진법을 진단의 중요한 수단으로 확립시켰다. 콜비사르는 검사 후의 진단과 부검 결과를 비교한 자신의 임상 경험을 추가하여 아우엔브루거의 저술을 보충하였으므로 그의 책은 유럽의 의사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그는 심장질환을 기능적 장애와 기질적 장애로 나누어 설명하였으며, 타진법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여 심장질환을 구분하여 진단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라엔넥, 로랑 베일, 뒤피트렝 등은 이러한 업적을 이어받은 그의 제자들이었다.
한편, 위대한 나폴레옹은 걸핏하면 의사들에게 화를 내는, 성미 급한 환자였다. 1807년 심한 천식으로 고생하던 나폴레옹은, 온갖 치료를 다했는데도 차도가 없자 의사들에게 여러 차례 짜증을 냈고, 황제의 질책이 두려운 주치의들은 진찰을 서로 미루고 있었다. 이때 폐질환을 검사하는 새로운 방법을 알고 있는 의사로 알려지기 시작하던 콜비사르의 이름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던 황제는 당장 그를 초빙하라고 명령하였다. 콜비사르의 견해는 다른 주치의들의 진단을 부정하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어쨌든 적절한 치료로 병세가 호전된 황제는 그를 주치의로 삼았다.
나폴레옹이“의학은 믿지 않지만 콜비사르는 믿는다.”고 말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콜비사르가 황실의 주치의가 됨으로써 프랑스 의학계에 몇 가지 긍정적인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즉, 이를 계기로 프랑스의 임상의학에 타진법이 널리 보급될 수 있었으며, 이후로 흉부질환의 진단 및 치료가 프랑스 의사들의 주된 관심사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콜비사르는 초상화만 보고서도 그림 속 인물의 사인이 심장질환이었을 것이라고 알아맞힐 정도로 경험이 풍부한 임상의사였는데, 보수를 많이 주겠다는 어느 병원의 초빙을‘진료시 반드시 가발을 써야 한다.’는 규정이 싫다는 이유로 거절할 정도로 개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또 황제에게 남들이 감히 못하는 이야기를 소신껏 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후일 로마 왕이 되는 아들의 출산을 기다리던 나폴레옹이 밤새 자기 자랑을 늘어놓자, 듣다가 지친 콜비사르가“황제 폐하, 제발 그만 좀 하십시오! 폐하가 고금에 유래가 없는 대단한 행운을 누리셨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운이란 돌고 도는 것입니다. 폐하의 운도 쇠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라며 꾸짖었다는 일화가 전해 올 정도다. 이 심한 말을 듣고 머쓱해진 황제는“선생은 꼭 무식한 농사꾼같이 말하는구려!”라며 언짢은 표정으로 방을 나가버렸다고 한다.
프랑스의 의학계를 지도하던 콜비사르는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일선에서 은퇴하여 끈질긴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이후 다시는 공직을 맡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