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문화
가장 큰 부와 명예를 누린 의사
입력 2005/11/03 19:50
이재담 교수의 간추린 의학의 역사 (4)
18세기 초 세계의 의학을 이끌었던 곳은 네덜란드의 레이덴이라는 마을이었습니다. 선진의학의 요람이었던 이탈리아 파도바 의과대학을 본받아 만든 레이덴 의과대학은 유럽 의학을 근대적 의학으로 발전시키는 기초가 된 곳이었습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의사가 부어하브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고, 그의 우수한 제자들은 다음 세대에 근대의학의 주류를 형성하였습니다. 당시는 의사의 수도 적고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한 때인 만큼 의사들의 대우가 가장 좋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큰 부와 명예를 누린 의사를 한 분 꼽자면 이 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현대의 병원에서는 환자의 차트에 병력, 현재의 증상(현증), 진단과 예후의 파악, 치료의 순으로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 되어 있는데 이러한 의무기록 방법은 18세기 의학의 중심지였던 레이덴에서 확립된 것이다. 의학교육에 임상강의(Bedside Teaching)가 정착된 것도 레이덴 대학에서 예전 이탈리아에서 도입된 수업 방법을 계승, 발전시켰기 때문이었다. 서양의학의 근대화 과정에서 이러한 여러 가지 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전 유럽 의사들의 스승’이라 불렸던 헤르만 부어하브였다.
부어하브는 1668년 레이덴에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레이덴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나 수학이나 화학, 식물학, 의학과 같은 과목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것을 깨닫고 하더윅으로 옮겨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 후 레이덴으로 돌아와 개업한 그는 1701년에 대학의 이론의학(Theoretical Medicine) 강사가 되었으며 1709년에 내과학과 식물학의 교수가 되었다. (당시에는 외래 진료소, 도서관, 해부실습실, 식물원의 4가지가 의과대학에 꼭 있어야 하는 시설로 인식되고 있었다.) 부어하브가 교수가 된 이듬해인 1710년에 그가 맡고 있던 레이덴의 식물원이 유럽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평판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일 년 동안 식물원에 존재하는 모든 식물의 이름을 완벽하게 외울 정도로 공을 들인 그의 노력에 힘입은 것이었다. 부어하브는 겨울 학기에 내과학이나 식물학 이외에 화학도 강의하였는데 주로 로버트 보일의 업적을 가르쳤으며 1718년 비들루의 사후에는 화학교수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그는 남자용 여섯, 여자용 여섯으로 된 병상에서 임상강의를 진행하였는데, 그의 강의는 너무도 유명해져서 전 유럽의 의학도들이 레이덴으로 몰려들었고, 전체 유럽의 의사 중에서 그의 강의를 들은 의사가 절반이 넘었다. 후일 괴팅겐 대학을 이끌게 되는 할러의 기록에 의하면, 자신이 레이덴에서 부어하브 교수의 강의를 수강하던 때에는 학생 수가 전부 120명이었는데, 그 중 반이 외국에서 온 학생이었다고 한다. 에딘버러의 먼로와 휘트, 빈의 반 스위텐과 하엔 등 그의 우수한 제자들은 러시아와 프러시아를 포함한 유럽 전역으로 퍼져 다음 시대의 의학을 주도하게 된다.
겉봉에‘부어하브씨, 유럽의 의사(Mr. Boerhaave, Physician in Europe)’라고만 쓰인 중국으로부터의 편지가 아무 문제 없이 배달되었다는 일화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그는 당대의 명의로 이름을 떨쳤다. 클리닉에는 매일 수많은 환자가 몰려들었으며, 그의 진찰을 받으려면 비록 신분이 왕이라고 하더라도 장시간 기다리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환자는 누구나 평등하게 대한다는 그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8세기의 의사는 의학뿐 아니라 과학, 철학적인 교양도 함께 지닌 최고의 지성인이자 사회의 엘리트였기 때문에 현대의 의사보다 훨씬 많은 존경을 받았으며 금전적으로도 윤택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통풍에 의한 관절염이 악화되어 은퇴할 때까지 레이덴 대학의 교수직 5개중 3개를 도맡았던 부어하브는 의사가 가장 존중받던 시절에, 모든 의사의 스승으로서 최고의 명예를 누렸던, 세속적인 의미에서 역사상 가장 성공한 의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1738년 70세로 사망했을 때 그가 남긴 유산은 200만 플로린(1플로린 금화 한 개의 무게는 약 7그램)이었다고 한다. 이는 어림잡아서 금 10톤에 해당하는, 요즘의 금 가격으로 환산해도 수천억 원이 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