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중독
(23) ‘미리 비관’ 중독
건국대병원
하지현 교수
예전에는 설날이 다가오면 가슴이 설?죠. 챙긴 세뱃돈으로 뭘 살까 즐거운 고민을 하며 예산을 짜기도 했었죠. 하지만 이제는 나눠줄 세뱃돈 챙기느라 허리가 휘지요? 아이들의 기대에 찬 눈빛을 보면서 제 어린 날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올해는 얼마나 챙겨 뭘 사면 될지’ 목록까지 만들면 하필 매년 제일 두둑하게 세뱃돈을 주시던 친척 어른이 오지 못한다는 비보가 전해져 억장이 무너지곤 했지요. 그래서 ‘어떤 기대도 말자. 가족들이 주는 의례적인 세뱃돈만 약간 들어올 것이다’라고 처음부터 아예 기대를 하지 않았더니 예기치 않던 ‘손 큰’ 친척의 방문이 이어지는가 하면 두둑한 세뱃돈 세례가 이어져 쾌감이 배가되는 것이었습니다.
성공은 학습을 낳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낙관적 희망보다 먼저 비관적 전망부터 내놓는 버릇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생일 파티에 초대한 친구들이 아무도 오지 않는 상상, 정기 승진 인사에서 나 혼자만 누락될 뿐 아니라, 한직으로 보직 변경되는 상상…. 이런 최악의 상상을 한다고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받는 상처의 강도는 좀 덜해집니다.
비관적인 전망을 그려놓는 것으로 어지간한 낙폭으로는 타격을 받지 않을 안전판을 마련하는 겁니다. 한편으로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머리에 그리는 순간 최악의 상황을 맞지 않기 위해 분발하고, 긴장하고, 노력하는 반대급부도 있답니다.
더 나아가 생일날 친한 친구 두 명이라도 와주고, 승진은 안되더라도 자리라도 보전했다면 실망스럽기보다 도리어 ‘감사의 마음’이 충만해지는 보너스까지 받게 되지요.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비극의 주인공으로 미리 포지셔닝 해놓는 말을 깔아놓습니다. 그러면 행여 나중에 성공해도 질시를 받지 않을 수 있고, 실패하더라도 동정과 연민의 대상은 될 수 있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갈수록 희망찬 기대를 하기보다 먼저 비관적 전망부터 갖는 버릇이 강화됩니다. 비관에 중독된 것이지요.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매사에 상처 받는 일이 없도록 해줍니다. 그러나 비관적인 전망을 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결과가 드러날 때까지 비록 적은 양이지만 지속적인 괴로움을 경험해야 합니다. 자기가 만든 비극적 결과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으니까요. 결과가 좋건 말건 치러야 할 비용입니다.
만일 결과가 좋았다면 쓸데없는 낭비였을 수도 있지요. 이건 마치 건강하게 100세 까지 장수할 사람이 자기 수입에 견주어 너무 비싼 보험료를 내는 바람에 젊은 시절 쪼들리며 사는 것과 같습니다. 비관적 전망은 과도한 보험료를 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판을 만들어놓는 것은 좋지만 현재의 삶을 옥죄면서까지 미래를 대비하는 것은 이성적인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당신 마음속의 불필요한 보험 몇 개는 해지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리고 남은 돈으로 삶의 여유를 넓히세요. 비관에 중독된 당신에게 필요한 해독제는 현재의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 건국대 신경정신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