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중독

(18) '독백중독'

건국대병원

하지현 교수

쉴 새 없이 주절주절… 내가 왜 이러지?

  •   전화가 울려서 보니 발신자는 ‘김○○’. 아, 이 전화 받아야 하나. 이 친구가 전화만 하면 겁이 납니다. 형식상 상대방 안부를 묻는 건 한 1초? ‘잘 지내?’란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자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요즘 뭘 하고 있고, 길 가다 누굴 만났고, 뭘 샀고, 뭘 먹었고…. 여기에다가 ‘우리 남편’ ‘우리 애’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이건 거의 ‘성대모사’ 수준입니다. 내가 한번도 본 적 없는, 관심 없는 사람들의 성대모사라. 정말 듣기 지겹지요. 뜨겁게 달궈진 휴대폰 때문에 귀에 화상이라도 입을 것 같습니다. 하여간 이 친구, 대단합니다. 나도 내 얘기 좀 해보자며 살짝 바꾼 화제를 어느 순간 홱 잡아채 다시 자기 스토리로 만들어 갑니다. 한두 시간 만나고 헤어질 때면, 무슨 1인극 독백연기를 보고 나온 기분입니다. 정말 피곤하지요.

      요즘 이렇게 ‘자기 얘기 늘어놓기’에 중독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치 고장 난 턴테이블같이 ‘나, 나, 나, 나’를 반복합니다. 속에 담은 말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남의 말을 들을 인내심과 호기심을 간단히 제압해 버립니다. 상대방이 듣기에는 별 내용도 없습니다. 자기 자랑을 늘어놓기도 하고, 그게 떨어지면 이번에는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하고…. 남편 이야기든, 남자친구 이야기든, 아침에 길 가다 우연히 본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든 할 것 없이 말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이 친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하는 얘기인지’ 궁금할 정도로 공허하고 알맹이 없는 말을 마치 랩 하듯 주절댑니다. 한동안 이 친구의 ‘독백’에 시달린 후, 함께 제3의 친구를 만나는 자리. ‘독백녀’(혹은 독백남)는 조금 전 내게 했던 레퍼토리를 그대로 반복합니다. 아, 정말 돌아버리겠습니다.

      대화가 아닌 독백에 중독된 이들은 쾌활하고 외향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타인의 평가에 굉장히 예민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상대방이 자칫 자기 아픈 곳을 건드릴까봐, 치부를 드러낼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나쁜 얘기가 나올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미리 선제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주도권을 잡고 이야기를 이끌면 그런 말이 나올 기회가 없을 테니까요. 이들은 또 잠시의 침묵도 못 견딥니다. 서로 조용히 있는 시간이 10초 이상 지속되면 상대방이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을 지겨워하고 재미없어할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먼저 어떤 주제라도 잡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니 대부분 자기가 알고 있는 얘기, 자기와 연관된 얘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말은 하지만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는 것은 있지만 오는 것이 없으니 내 안에 채워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공허합니다. 그 빈 공간은 외로움을 자극합니다. 그래서 결국 다시 자기 얘기만 하게 되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독백중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꾹 참고 듣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얘기할 때까지 참고 기다려보세요. 도저히 못 견디겠으면 내 얘기를 하기보다 친구의 안부와 근황을 물어보든지, 공통의 화제가 될 이야기를 꺼내보세요. 생각보다 남의 말을 듣는 것도 재미있다는 것, 내가 공격당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다 보면 준비된 레퍼토리를 읊조리느라 고생할 필요도 없어질 겁니다. 사실 당신도 그러느라 지겨웠지요?

    /건국대 신경정신과 교수
* 본 칼럼의 내용은 헬스조선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수 많은 집착 속에서 현대인은 어느 덧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시대의 중독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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