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중독
(16) '작심(作心)' 중독
건국대병원
하지현 교수
시작이 창대하면 결말은 비극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원대한 신년 계획부터 세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이어트에 성공하겠다며 일단 ‘44’ 사이즈 옷부터 사는 사람, 또 갖고 있는 라이터와 담배를 남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쓰레기통에 처박으면서 금연을 선언하는 사람.
‘이제는 동북아 시대’라면서 중국어 학원을 찾아간 사람은 ‘6개월을 미리 등록하면 2개월이 무료’라는 말에 과감히 신용카드를 꺼내 듭니다. 어차피 1년 이상 다닌다는 포부니까요. 극적으로 새해 선언을 하기 위해 정동진까지 가서 해돋이를 맞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거창하게 시작하지만 매년 그 끝은 어떻죠?
‘작심삼일’이란 말이 있듯, 시작은 카리스마 넘치지만, 그 결심이 한 달을 넘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바로 작심의 아픔입니다. 매년 새로운 결심을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바빠서, 힘들어서, 혹은 그냥 시들해져서 등등 다종다양한 이유로 포기해 버립니다.
원대했던 목표는 허공으로 연기와 같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면서도 정초에 뭐라도 하나 결심을 하지 않으면 허전하니 왜 그런 것이죠. 정초만 되면 찾아오는 ‘작심 중독’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안될 줄 알면서도 자꾸 작심을 하는 이유는 인간은 꿈을 꾸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꿈을 꾸고 있는 동안만큼은 행복하거든요. 지금까지의 삶이 재미없고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의지박약을 탓할 것이라는 뻔한 드라마의 결말을 알면서도 매해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람으로 환생하고픈 변신의 환상이 스멀거립니다. 주저하며 미루던 변신의 첫 발자국을 떼는 데는 새해 첫날만큼 상징적으로 좋은 날이 없지요. 거기다가 연말의 흥청거리는 주지육림의 분위기가 ‘이래서는 안돼’라는 변화의 동기가 됩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불편하고 괴롭기는 하지만 지금 나름대로 안정적이거든요. 독재국가에 사는 국민들이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아이러니와 같이 인간의 본성은 뒤틀렸고 문제가 많지만 자리가 잡힌 현재의 균형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급작스러운 변화를 추구하게 되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강한 본성의 저항에 부딪히게 되지요. 새해가 온 것은 그저 상징적인, 심리적 의미만을 가질 뿐 그 어떤 실질적 강제력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젠장 알았어!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래’라며 새해부터 해장술로 시작할까요. 너무 재미없겠지요. 꿈을 꾸지 못하는 인간은 앞으로 나아갈 동력이 없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이렇게 해보면 좋겠습니다. 구체적 목표보다는 추상적인 화두를 정하는 것입니다.
‘행복, 자유, 세계 평화’와 같이 올 한 해 동안 내 마음속에서 되새겨보면서 삶의 지표가 되는 한 단어나 한 문장을 정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큰 주제어를 정하는 거죠. 옷으로 말하면 일종의 ‘드레스 코드’ 이고요. 그리고 삶을 그 단어에 맞춰 조금씩 바꿔 가는 것이지요.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면 도리어 저항이 먼저 생깁니다. 차라리 새해에 평소 신경 쓰지 못했던 삶의 방향과 인생의 비전을 떠올려 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변하기 힘든 당신의 인간성에 큰 울림 한 번 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 건국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