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중독
(15) '해설'중독
건국대병원
하지현 교수
‘친절한’ 해설자, 알고 보면 잔인해
동료가 회사를 그만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딱 보면 알잖아? 팀장이 그렇게 볶아대지, 전공에 안 맞는 일만 시키지, 부서는 비전 없어서 구조 조정 1순위지. 그 친구 MBA 준비한다는데…. 그리고 말이야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 이때 이들의 눈망울은 평소와 달리 초롱초롱하게 반짝입니다. 마치 형사 콜롬보나 소년탐정 김전일이 사건 관계자들을 몽땅 불러다 놓고 “이 사건은 말이죠”라며 한 큐에 풀어내는 듯 합니다. 그럴싸한 해설을 듣다 보면 정말 맞는 말 같습니다.
인간은 좋지 않은 사건이 주변에서 벌어지면 어떻게든 그 원인을 찾고 싶어합니다. 이유를 알고 맞는 매 10대보다 그냥 지나가다 맞는 1대에 열 받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원인을 모르면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또 만에 하나 그 사건에 조금이나마 개입돼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주는 죄의식은 아무리 입을 헹궈도 가시지 않는 찜찜함을 머금게 합니다. 그래서 더욱더 적극적으로 인과 관계 속에서 원인을 찾으려 노력하는데, 특징은 ‘나는 이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하려 한다는 점이죠.
이런 심리의 기저에는 ‘결백한 방관자’(innocent bystander)가 되고픈 욕구가 숨어있습니다. 사건 발생 후 이 ‘방관자’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세요. 그 사람과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생긴 일인데도 막상 화자(話者)의 역할은 없거나 미미하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같은 조직에 있거나 관계가 엮여 있다면 친밀한 정도에 따라 분명히 어느 정도는 관련이 있겠지요. 하다못해 중간에 조언 한 마디라도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건을 놓고 구구절절 해석을 내리는 이 ‘방관자’들은 그저 객관적 시점으로 구경을 했을 뿐이라 주장합니다. 특히 좋은 일이 아닐 때에 이런 경향은 강화됩니다. 자기가 그 사람의 불행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고픈 욕구가 크기 때문이지요.
‘방관자’들은 남들 일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씹어대는’ 쪽과는 좀 다릅니다. 흉을 보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도리어 사뭇 진지하고 객관적이며 최대한 합리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한답니다. 이들은 사건의 주인공을 싫어하거나 미워해서 갖가지 해석을 내린다는 인상을 주는 건 싫어합니다. 어디까지나 착하고 결백한 제 3자여야 하니까요.
이렇게 순결한 해설자에게 우리는 “아, 그랬구나, 맞아 맞아”라며 맞장구를 칩니다. 자칫하다가는 우리도 그 시나리오에서 등장할 수 있습니다. ‘해설하기’에 중독된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그 자리에 없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짜맞추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참 이야기가 흘러가는 동안은 화장실 가기도 겁나죠.
자신의 해석을 널리 퍼뜨릴 때, 사람들이 끄덕거리면서 맞장구칠 때의 카타르시스는 짜릿한 전율을 줍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능수능란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잔인할 정도로 냉철한 해석을 더해나갑니다. 진정한 프로페셔널의 향취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냉정하고 객관적인 척 해설에 나서는 사람들일수록, 마음속에는 자신도 의식 못하는 원초적 공격성이 꽁꽁 숨어있을 수 있다는 것,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건국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